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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구마나리(久麻那利)는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 - 최초주장

윤여동 2020. 11. 7. 20:48

윤여동설 백제 구마나리(久麻那利)는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 - 최초주장

 

 

 

   일본서기 웅략천황 20년 조를 보면,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백제기(百濟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개로왕 을묘년(A.D.475) 겨울 맥(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 : 百濟漢城)을 친지 77야에 왕성이 함락되어 드디어 위례(尉禮 : 慰禮城)를 잃었다.[필자주 : 당시의 백제 도읍이었던 한성과 위례성이 같은 성이거나 근접해 있던 성일 가능성이 있는 기록이다] 국왕 및 대후(왕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라고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과 당시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이 함락될 때 백제 개로왕과 왕후, 왕자 등 일족이 모두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21년 조를 보면, “봄 삼월 (웅략)천황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하여 파멸하였다고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 : 熊津)를 문주왕에게 주고 그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일족이 이미 망하여 창하에 모여 걱정한다 하였지만 사실은 천황의 덕으로 다시 그 나라를 일으켰다.[문주왕은 개로왕의 동복동생(母弟)이다. 일본구기(日本舊記)에 구마나리를 말다왕(백제 동성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 이는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久麻那利)는 임나국(任那國) 하치호리현(下口+多呼唎縣)의 별읍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가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고 도읍인 한성(漢城)과 위례성(慰禮城)을 함께 잃었고, 이때 왜국의 웅략천황이 구마나리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곳으로 도읍을 옮길 수 있었다고 이해되도록 기록되어 있고,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A.D.475) 조에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 문주왕이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긴 상황과 내신좌평 곤지의 사망, 병관좌평 해구가 문주왕을 시해한 정황, 나이어린 삼근왕이 해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상황 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23년 조를 보면,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文斤王 : 삼근왕)이 죽었다.

천황[필자주 : 동성왕을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은 동성왕의 할아버지였던 반도백제 모도왕이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천황이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때 반도백제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고대의 왜국까지를 통치권내에 두고 있었던 것일까?]이 곤지왕(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末多王)이 어리지만 총명하므로 칙하여 궁중으로 불렀다. 친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은근히 타일러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무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의 군사 500인으로 하여금 그 나라로 호송하게 하였다. 이를 동성왕(東城王)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일본서기 무열천황 4년 조를 보면, “무령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사마왕이다. 이는 곤지왕자(琨支王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이 이복형이다.(卽末多王異母兄也)...........지금 생각해보니 도왕(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말다왕(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인데, 이를 이복형[異母兄]이라 하는 것은 미상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본서기 찬자들도 동성왕과 무령왕 사이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령왕이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즉말다왕이모형야(卽末多王異母兄也)”라는 문장을 어떻게 명색이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무령왕이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지 매우 의아하다. 이는 동성왕이 무령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위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마치 일본의 웅략천황[필자주 : 반도백제 모도왕과 왜국의 웅략천황이 동일인이었을까?]  이 대륙백제의 운명과 왕위계승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 필자는 일본서기가 혹시 대륙백제에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하고 한반도 지모밀지로 도망쳐 와서 다시 나라를 세웠던 무광왕(武廣王)의 반도백제(半島百濟) 역사와 왜국(倭國) 역사를 뒤섞어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동성왕과 무령왕은 모두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의 아들이었던 곤지왕자의 아들들이었다. 즉 동성왕과 무령왕은 당시 한반도에서 대제국으로 성장해 있었던 반도백제 모도왕의 손자들이었다.

  모도왕의 장손자는 후일 모도왕의 뒤를 이어 반도백제의 왕위에 오른 남제왕이었고,

  둘째손자는 동성왕이었으며,

  무령왕은 여섯째 손자였다.[필자주 : 일본서기에 무령왕이 태어나자 백제로 돌려보내고, 그 아버지인 곤지가 왜국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아들들과 함께 왜국에 도착했다고 하였고, 동성왕이 둘째아들이라고 하였다. 즉 동성왕과 무령왕은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른 배다른 형제라는 말이 되고, 필자가 보기에는 동성왕이 약 열 살쯤 위인 형이었고, 무령왕이 동생이었다]

   따라서 당시 강국이 되어 있었고, 대륙백제를 병합했던 반도백제의 모도왕이 자신의 둘째손자인 말다(동성왕)를 지목하여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렸다면 모를까 어떻게 왜국의 웅략천황이 말다(동성왕)를 대륙백제의 왕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륙백제 개로왕과 반도백제의 모도왕(牟都王) 사이에는, 앞서 대륙백제에서 무광왕과 근초고왕의 왕위다툼 이후 대륙과 한반도로 각각 떨어져 무려 100여 년 간이나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두 백제(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옛 원한을 풀고 다시 통합하기로 약속하였고, 그 약속에 따라 반도백제 모도왕이 아들인 곤지를 대륙으로 보내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도록 명하게 되어 곤지는 한반도를 떠나 대륙백제로 가서 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곤지가 대륙백제 개로왕의 왕비 중 한 명과 눈이 맞아 둘 사이에 아이(후일의 무령왕)가 잉태되었고, 만삭이 되었을 때 대륙백제와 왜국사이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곤지가 그를 수습하기 위하여 대륙백제를 떠나 왜국으로 특사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곤지는 개로왕에게 사실을 말하고 개로왕의 왕비를 자신에게 주어 함께 가게 해 달라고 청하게 되는데, 개로왕은 그러한 정황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만삭이 된 자신의 왕비를 곤지와 혼인시킨 후 함께 왜국으로 보내며 혹시라도 중간에 애를 낳게 되거든 다시 돌려보내라고 하며 출발시킨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축자의 각라도에 이르렀을 때 사마(후일의 무령왕)가 출생하게 되자 곤지는 배를 한 척 준비하여 왕비와 태어난 아이는 다시 대륙백제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다섯 아들들을 데리고 왜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 여름4월 조에 곤지와 개로왕의 왕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잘 읽어보면 필자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후 사마(후일의 무령왕)는 대륙백제에서 다시 반도백제로 가서 성장했던 듯하다.

 

   그런데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한성이 함락되고, 한성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던 위례성도 고구려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며, 개로왕과 왕비, 왕자 등도 모두 잡혀 죽게 되는데, 이때 개로왕의 동복동생인 문주는 전투가 불리해져 가자 개로왕의 명을 받고 신라에 청병을 하기 위하여 미리 성을 빠져나와 신라로 갔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고, 곤지도 그때 왜국 또는 반도백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던 듯하다.

   그런데 대륙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과 위례성을 잃고 오갈 데가 없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왜국의 웅략천황이 구마나리(久麻那利)라는 곳을 문주왕에게 주어 백제를 다시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구마나리(久麻那利)가 구마는 곰()을 말하고 나리는 나루()를 말하는 것이라면, 백제가 역사적으로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와 딱 들어맞는데,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이 구마나리는 왜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임나국(任那國)의 하치호리현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말썽 많은 임나일본부와 관련 있는 지명인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대륙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이고, 웅진(熊津)은 진황도 노룡(盧龍)이며, 임나국(任那國)은 진황도시 일원으로 나타나며, 고대의 왜국(倭國)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문주가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신라로부터 돌아와 보니 한성은 이미 함락되어 형인 개로왕도 죽고 왕비, 왕자들도 모두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었으므로 문주는 도읍을 급히 웅진(熊津)으로 옮기고, 왕위에 올라 외척인 해구(解仇)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반도백제 모도왕의 아들인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아들인 삼근을 태자로 봉하게 된다.

   그러자 병관좌평 해구가 반도백제의 왕자인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두 백제의 통합을 다시 추진하려는 문주왕의 방침에 반발하게 된다.

   그리하여 해구는 얼마 후 내신좌평 곤지를 죽여버리게 되고, 또 문주왕 마저 시해한 후 나이 어린 삼근왕을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이를 보면, 당시 대륙백제의 외척이었던 해씨세력들은 두 백제의 통합에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반도백제 모도왕은 대륙백제 삼근왕과 해씨들을 타도하라고 명하게 되고, 얼마 후 해구 일당도 토벌되고, 삼근왕도 15세의 어린 나이에 죽게 되어 해구의 반란은 진압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륙백제를 무력으로 흡수통합한 반도백제 모도왕은 죽은 곤지를 대신하여 둘째손자인 말다를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리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었고, 또 동성왕이 재위 23년에 백가에게 또 시해 당하자 당시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었던 남제왕이 다시 동생인 사마를 대륙으로 보내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이가 곧 무령왕이었다.

   삼국사기는 대륙삼국의 역사서이고, 동성왕과 무령왕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었기 때문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그 후의 대륙백제 왕들도 모두 이 동성왕과 무령왕의 후손들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반도백제의 역사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고, 따라서 그 왕위계승에 대하여도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당연히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이 했어야 할 말이 왜국의 웅략천황이 한 말로 바뀌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반도백제의 모도왕이 곧 왜국의 웅략천황과 동일인이었을까?

   아니면 한반도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건국되었던 반도백제가 북쪽으로 강역을 넓혀 고대 왜국이 위치하고 있었던 지금의 요동반도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었을까?

 

☆ 그리고 일본구기에 구마나리를 말다왕(동성왕)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대륙백제의 문주왕이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신좌평 곤지도 죽고, 문주왕도 해구에게 시해당하고, 반란을 도모한 병관좌평 해구도 죽고, 삼근왕도 죽는 혼란기를 지나 말다(동성왕)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웅진에 도읍하고 있었으니, 구마나리를 동성왕(말다왕)에게 주었다는 일본구기의 기록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