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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주몽에게는 아들 유리와 졸본부여 둘째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또 하나의 딸이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1. 1. 17. 03:04

윤여동설 – 주몽에게는 아들 유리와 졸본부여 둘째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또 하나의 딸이 있었다 - 최초주장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의 풍광]

 

   고구려의 왕위계승이 중간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그 단서를 여러 사서들의 기록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한서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에는 다섯 부족이 있는데,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진 뒤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고구려전에도, “고구려에는 본래 다섯 부족이 있는데,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이다. 원래 연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한다..........연노부는 본래 나라의 주인이었으므로 비록 지금은 왕이 되지 못하나 그 적통의 대를 이은 사람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종묘에 나아갈 수 있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왕위계승이 중간에 변화가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너무도 엉뚱하여 오기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서의 기록들도 보이는데,

 위서(북위서) 고구려전의, ”옛날에 주몽이 부여(동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을 하였다. 주몽이 (졸본)으로 도망간 후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여해(閭諧)라 하였다. 장성하자 주몽이 왕이 된 것을 알고 곧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왔는데,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고치고 국사를 위임하였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위에 올랐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왕위에 올랐다.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莫來)가 왕위에 올라 부여(동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대패하고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막래의 자손으로 이어져 후예 궁(宮)에 이르렀는데,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볼 수가 있어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라는 기록과,

   북사 고구려전의, “주몽이 부여(동부여)에 있을 때 그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 주몽이 (졸본으로) 도망한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처음에는 여해(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왕이 된 것을 알고 그 어머니와 함께 (동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도망하여 오니 그를 여달(閭達)이라 이름을 지어주고 국사를 그에게 위임하였다. 주몽이 죽고 아들 여율(如栗)이 왕위에 올랐다.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莫來)가 왕위에 올라 부여(동부여)를 병합하였다”라는 기록인데, 물론 위의 위서(북위서) 고구려전의 기록과 북사 고구려전의 기록은 착각에 의한 잘못된 기록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건국시조인 주몽왕(추모왕)의 아들인 2대 유리왕의 이름이 여해나 여달이 아니라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3대 대무신왕의 이름은 여율이 아니라 무휼(無恤)이었고,

  4대 민중왕의 이름은 해색주(解色朱)였으며,

  5대 모본왕의 이름은 막래가 아니라 해우(解憂) 혹은 해애루(解愛婁)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서나 북사의 찬자들은 무슨 이유로 고구려전에 이렇듯 이상한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일까?

  그리고 여달(閭達), 여율(如栗), 막래(莫來)라는 인물은 고구려 왕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며,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사서들에 고씨(高氏)로 나타나는 고구려 6대 태조대왕 궁()의 아버지였고, 해씨(解氏)인 고구려 유리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라는 인물은 또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고씨(高氏)였을 고재사(高再思)가 해씨(解氏)였을 유리왕 해유리(解類利 或 解孺留)의 아들이 될 수 있었을까?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왕(추모왕)에게는 동부여에서 살 때 예씨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 유리(또는 유류, 필자주 : 후일의 유리왕)가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주몽에게는 혈손이라고는 오직 외동아들인 유리왕 한 명 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주몽이 22세 때 동부여에서 역모에 버금가는 어떤 큰 사건에 연루되어 잡히면 죽게 되는 급박한 상황에 이르자, 주몽은 어머니인 유화와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인 예씨를 동부여에 남겨둔 채 친구인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사람과 함께 급히 동부여를 떠나 졸본부여로 도망쳤었다.

  그리고는 졸본에 도착하여 졸본부여 왕의 둘째공주와 다시 혼인을 하였다고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그 왕위를 이어받아 왕위에 올랐다.

 

☆ 혹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의 기록 즉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요, 둘째 아들은 온조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라는 기록을 보고 비류와 온조도 주몽의 친아들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사실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 졸본부여 왕족인 부여우태와 연타발의 딸이었던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로서 성씨가 부여씨였다.

  부여비류,

  부여온조.

  그런데 주몽왕이 남편이 일찍 죽어 두 아들 딸린 젊은 과부가 되어 있던 소서노와 한때 재혼을 함으로써 주몽과 비류, 온조는 한때 의붓아버지와 의붓아들 사이가 된 적이 있으나 소서노가 졸본에서는 자신의 아들들을 왕위에 올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을 떠나 진번 남쪽 한산 부근으로 옮겨 가버리게 되어 이들의 관계는 끝나게 되고, 후일 비류와 온조는 자라서 한산부근에 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혼인했던 졸본부여왕의 둘째공주와의 사이에 딸(공주)이 하나 있었음을 밝혀보고자 한다.

 

☆ 주몽왕(추모왕)의 딸(공주)이 몽골에서 시조, 성녀로 추앙받고 있는 알랑고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고구려의 왕위계승을 보면, 건국시조 주몽왕(추모왕),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까지는 성씨가 해씨(解氏)로 나타나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그 이후 마지막 왕인 28대 보장왕까지 고구려왕들의 성씨는 고씨(高氏)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필자는 일찍이 고구려가 고씨(高氏) 단일 성씨로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해씨(解氏)와 고씨(高氏) 두 성씨로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그것은 역사적 팩트이다.

 

   필자가 고구려가 해씨와 고씨 두 성씨로 왕위계승이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고 보는 것은, 주몽이 동부여로부터 졸본으로 도망쳐 온 후 재혼했던 졸본부여 둘째공주와의 사이에 낳은 딸(공주)이 하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공주 사이에 낳은 딸(공주)이 하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해씨였던 고구려 5대 모본왕(이름은 해우 또는 해애루였다)으로부터 고씨였던 6대 태조대왕(고재사의 아들로서 이름은 고궁이었다)으로 왕위계승이 이루어질 때, 아무런 혼란 없이 왕위계승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고대에 왕실의 성씨가 바뀐다는 것은 그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섰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고대 왕조에서 왕실의 성씨가 중간에 바뀌는 경우는 우리의 신라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예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고구려는 고구려(高句麗)라는 하나의 왕조를 이어갔는데도 "해씨(解氏)와 고씨(高氏)"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졌고, 왕의 성씨가 해씨(解氏)에서 고씨(高氏)로 바뀌는 과정 즉 해씨인 5대 모본왕에서 고씨인 6대 태조대왕으로 왕의 성씨가 바뀌는 때에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왕위계승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80년 조를 보면, “처음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어질지 못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유리왕)의 아들 재사를 세우려 하니 재사가 말하기를 자기는 이미 늙었다하여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5대 모본왕이 죽었을 때 고구려의 대신들이 유리왕의 아들이었던 고추가 재사를 왕위에 올리려고 하였으나 재사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아들인 궁(태조대왕)을 왕위에 올리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어, 재사나 궁이 고구려의 왕위에 오르는데 자격에 아무런 하자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필자는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공주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고, 이 딸이 성장하여 고씨(高氏)에게 시집가서 낳은 후손들이 곧 고구려의 고씨왕들이었다고 본 것이다.

 

  즉 고구려의 왕위는 주몽왕(추모왕)의 친손인 해씨(解氏)와 외손인 고씨(高氏)로 이어졌기 때문에 고구려 대신들이나 백성들이 그를 역성혁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스런 왕위계승으로 인식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친손이나 외손이나 주몽왕(추모왕)의 피를 이어 받은 혈손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에 왕의 성씨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왕위계승에 아무런 혼란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위서 고구려전이나 북사 고구려전에 기록되어 있는 여달(閭達), 여율(如栗), 막래(莫來), 그리고 삼국사기에 6대 태조대왕 궁()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재사(再思)가 곧 고씨(高氏)로서,

  필자가 보기에 여달(閭達)은 주몽왕(추모왕)의 딸과 혼인했던 왕의 부마(사위)로서 고여달(高閭達)이었을 것이고,

  고여율(高如栗)은 주몽왕의 외손자,

  고막래(高莫來)는 외증손자였을 것이며,

  고재사(高再思)는 외고손자,

  6대 태조대왕 궁()은 주몽왕(추모왕)의 외5세손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내막을 확실하게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위서와 북사의 찬자는 어느 사람으로부터 고구려 태조대왕 궁()의 선조 이름이 여달, 여율, 막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이들이 고구려 초기에 왕위에 올랐던 왕의 이름이라고 추측하고는, 이들이 주몽왕(추모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했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고구려 유리왕이 이복여동생의 증손자였던 고재사를 양자로 받아들였던 것은 유리왕이 늦은 나이에 얻은 귀염둥이 막내아들 여진이 유리왕 말년에 졸본에 갔다가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유리왕이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당시 죽은 여진과 같은 나이 또래였던 재사를 양자로 입적시켰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고재사를 유리왕의 아들로서 고추가이며 태조대왕 궁의 아버지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위에서 밝힌 내용을 감안하여 고구려 초기 왕위계승도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고구려 초기 왕위계승도]

 

                                               시조 추모왕(주몽왕)(해씨)

(해씨)                                                 ↓                                                 (고씨)

..............................................................................................................................................

2대 유리왕                                                                      주몽왕의 딸 = 고여달과 혼인

.......................................                                                    (해씨)

↓                    ↓                                                                                          ↓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고여율(외손자)

↓                                                                                                               ↓

5대 모본왕                                                                                       고막래(외증손자)

                                                                                                                 ↓

                                                                                                            고재사

                                                                                                    (유리왕의 양자로 입적)

                                                                                                                ↓

                                                                                                    6대 태조대왕(고궁)

 

                                                                                         (이하의 고구려왕들은 모두 고씨)

 

[추모왕의 친손]                                                                             [추모왕의 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