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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9성을 쌓았던 곳은 옛 북옥저(北沃沮) 땅이었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1. 12. 5. 09:56

윤여동설 - 고려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9성을 쌓았던 곳은 옛 북옥저(北沃沮) 땅이었다 최초공개

 

 

 

 

  고려는 110710월에 이르러, 여진(女眞) 정벌을 위해 17만의 별무반을 출동시키기로 결정하고, 윤관 장군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는다.

  그리고 여진 정벌을 위해 출병하는 장수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예종은 119일 개경을 출발하여 15일에 서경에 도착했고, 12월에 이르러 왕은 윤관 장군과 오연총에게 부월을 하사함으로써 군사들의 출발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왕의 명을 받은 윤관장군은 별무반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여진을 축출하고 그곳에 아홉 개의 성을 쌓는다.

  소위 고려 동북9성인데,

  영주성(英州城)을 몽라골현(몽라골령이라고도 한다) 아래에 9백50칸 규모로 쌓았고,

  웅주성(雄州城)을 화관산(화곶령이라고도 한다) 아래에 9백92칸 규모로 쌓았고,

  복주성(福州城)을 오림금촌에 7백74칸 규모로 쌓았고,

  길주성(吉州城)을 궁한이촌(궁한이령이라고도 한다)에 6백70칸 규모로 쌓는다.[최북단]

  그리고 다음해인 서기 1108년 2월에는 함주성(咸州城)과 공험진성(公嶮鎭城)을 쌓은 후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 정계비를 세웠고,

  다시 3월에 의주성(宜州城), 통태성(通泰城), 평융성(平戎城)을 쌓아 9개의 성을 완성하고 개선했는데,

  몇 년 뒤 고려의 조정에서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기로 결정하게 되어 그 성들을 모두 다시 여진족에게 반환하게 되는 것인데, 여진족은 그 동북9성 지역을 기반으로 힘을 키워 후일 금(金)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고려의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쌓았던 그 동북9성 설치지역이 지금의 어디였는지 전혀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고려 동북9성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 말해주고 싶다.

 

  옥저는 셋이 있었다.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였는데, 이들은 대개 옛 태백산(太白山)이었던 지금의 북경 동북쪽 하북성과 내몽골의 경계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해발 2,067m)의 동쪽 지역에 위치했던 나라들이었다.

 

옥저(沃沮)는 한반도의 함경도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赤峰市) 일원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다.

 

  고려는 철령 이북의 남옥저와 동옥저까지는 통치하고 있었으나, 북옥저 지역은 여진(女眞)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들이 점점 동옥저 지역까지 진출해 약탈을 일삼자 고려는 위기감을 느끼고는 여진족을 정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때 윤관 장군이 여진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서북방으로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와 정주 두 고을에 접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는,점령한 지역이 300리이며,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서북방은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 정주 두 고을에 연접하였는바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히 우리 백성들이 거주할 만한데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개마산의 동남방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300리 땅은 바로 옛 북옥저(北沃沮)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 초기 추모왕(주몽왕)이 기원전 28년에 부위염을 시켜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그 지역을 고을로 만들었다고 삼국사기 고구려전에 기록되어 있는 북옥저이기 때문에 영주청벽기에 본래 고구려 영토였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은 약 동서 900, 남북 300리쯤 되는 곳으로서 면적으로 보면 반천리쯤 되는 곳이다.

  남북의 거리가 300리쯤 되는 땅이기 때문에 점령한 지역이 300리라고 했다고 생각되는데, 후한서 동옥저전에는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00리 떨어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대에는 이 지역을 오국성(五國城)이라고도 불렀는데,

  유명한 사냥매인 해동청(海東靑)의 산출지였고,

  요(, 거란)나라 천조제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해빈왕으로 강등되어 살다 죽어 묻힌 곳이며,

  정강의 변 때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왔던 송나라 휘종과 흠종이 비참하게 살다 죽어 묻힌 곳이기도 한 곳이다.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일부와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일부가 옛 북옥저였고, 오국성이었으며,

  북경 일원이 옛 요동(遼東)이었고,

  하북성 관성현(寬城縣, 관성만족자치현)이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이었고,

  피서산장이 있는 하북성 승덕시(承德市)가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西京)이었다.

  위 그림을 보시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함주로부터 공험진까지 아홉 개의 성을 축성하고 선춘령에 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공험진은 고령진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고 고라이(古羅耳)를 넘고, 오동첨, 영가첨을 지나면 소하강에 이르는데 강가에 공험진 옛 터가 있고, 남쪽으로는 구주, 탐주와 이웃하고 북쪽으로는 견주에 접했다고 하고,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있으며, 윤관이 이곳까지 개척하고 공험진에 성을 쌓고는 곧 선춘령 꼭대기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의 사면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글자를 새겼으나 오랑캐들이 그 글자를 모두 지워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 속의 두만강을 지금의 한반도 동북쪽 두만강으로 잘못 알고 고려의 동북 9성이 한반도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려의 두만강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을 지나는 음하(陰河)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는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에 도읍하고 그 주변 땅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고,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모두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다.

  한반도는 이성계의 조선(朝鮮)부터 우리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