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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의문의 섬 덕물도(德物島)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22. 1. 29. 14:37

윤여동설 의문의 섬 덕물도(德物島) 위치 찾기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A.D.660) 조를 보면,

  “3월 당나라 고종이 명을 내려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방면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륙군 1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고 왕(신라왕, 태종무열왕 김춘추)을 칙명으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군사로서 성원하도록 하였다.

  여름526일에 왕이 김유신, 김진주, 김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서라벌)을 출발하여 6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래주(萊州, 필자주 : 산동반도 래주)로부터 출발하는데, 전선이 천리를 잇달아 물길을 따라 동쪽(?, 필자주 : 서북쪽으로 갔다가 동북쪽으로 향했다고 해야 옳은 기록일 것이다)으로 왔다.

  6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어 병선 1백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10일 백제에 도착하여 (사비성의) 남쪽에서 대왕의 군사와 모여 의자(의자왕)의 도성을 무찌르려고 한다하니 법민이 말하기를, “부왕이 지금 귀국의 군사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대장군이 왔다는 말을 들으시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불이나케 왔을 것입니다하였다.

  소정방이 기뻐하면서 법민을 돌려보내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소정방의 군사가 매우 장하더라는 말을 하니 왕이 기쁨을 참지 못하였다.

  다시 태자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김품일과 김흠순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이에 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가을79일에 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黃山之原)으로 진군을 하니 백제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요해지를 차지하여 세 군데에 군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등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승리를 못하고 군졸들은 지쳐 있었다

                                                             ........(중략)........

  백제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계백(계백장군)도 여기에서 죽고 좌평들로서 충상, 상영 등 20여명을 사로잡았다.

  이날에 소정방이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이르러 백제 군사를 만나 맞받아 싸워 이를 크게 이겼다.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영에 이르니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신라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을 베려 함에 김유신이 무리들 앞에서 말하기를 대장군이 황산전투(황산지역)를 보지도 않고 다만 늦은 것만을 죄를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수겠다하고는 곧 무기를 잡고 군문에 서니 머리털이 고추서고 허리에 찬 칼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소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소정방의 발등을 밟으면서 말하기를, “신라 군사들이 장차 변고를 일으킬 수도 있다하니 정방이 김문영을 풀어 주었다"

                                                        .............(이하생략)...............

 

  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소정방과 김법민(필자주 : 신라 문무왕의 태자시절 이름)이 만나 작전계획을 세웠던 장소로 덕물도(德物島)가 언급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반도사관론자들은 이 덕물도가 인천 앞바다에 위치하고 있는 덕적도(德積島)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의 신라, 백제, 고구려 그리고 가야도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요동(遼東)은 후한서에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필자주 : 고대의 10리는 지금처럼 4km가 아니라 2.3km였다]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고구려와 백제는 고대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를 말하는 것이고,

백제의 도읍 웅진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며, 마지막 도읍 사비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난현(난주)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말하는 것이고,

고대의 왜국 또한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 고대 삼국역사의 진실이다.

  서기 660년에 발생한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전쟁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연안에서 이루어진 일인데, 그 기록을 한반도로 가지고 와서 한반도에서 그 전투의 현장을 찾으려 하였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덕물도(德物島)는 지금의 천진(天津) 부근 발해 연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한반도 인천 앞바다에서 찾을 일이 아닌 것이다.

 

[고대에는 발해 해수면이 현재보다 10m쯤 높았고, 지금 천진 부근의 낮으막한 산들은 옛날에는 섬이었을 것인데, 그 중에 하나가 덕물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