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탐라(耽羅, 제주) 출신이었다고? - 최초주장
북사와 수서 백제전을 보면, “그 나라의 남쪽에서 바다로 3개월을 가면, 탐모라국(耽牟羅國))이 있다. 남북이 1천여리, 동서가 수백리인데,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부용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필자주 : 한반도의 제주도는 이 정도로 크지 않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A.D.498) 조를 보면, “8월 왕이 탐라(耽羅)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 곳을 몸소 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동성왕 때 탐라(탐모라)가 백제의 통치권 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옛 탐라, 탐모라가 곧 제주(濟州)를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언급하는 탐라(탐모라)는 한반도 남쪽의 제주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역을 말하는 것이 우리 고대사 해석의 어려움이다.
그리고 북제(550-577)에서 백제(대륙백제) 위덕왕[재위:554-598]에게 보내온 작위가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였는데, 이는 이때 백제가 대방군(帶方郡)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또 동청주(東靑州) 즉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로서 필자가 보기에 이는 백제가 동성왕 때부터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역을 계속 통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위 : 공자 초상]
[위 : 맹자 초상]
역사적으로 청주(靑州)와 동청주(東靑州)는 태산(泰山)과 적산법화원이 있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역을 이르는 말로서, 고대에는 지금의 산동성 지역에 제(齊)나라, 노(魯)나라가 위치하고 있었고, 추(鄒) 나라라고 하는 조그만 나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사람이고,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추나라는 노나라 가까이에 위치했던 소국으로서 노나라에 합병되었다고 하니 결국 맹자도 공자와 같이 노(魯)나라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곧 공자와 맹자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출신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산동성 즉 청주와 동청주가 백제 동성왕 때 북위(北魏)와 백제(대륙백제)와의 전쟁에서 백제(대륙백제)가 승전한 후 전쟁배상금으로 빼앗은 곳으로서 탐라(耽羅), 탐모라(耽牟羅, 耽毛羅), 탁라(乇羅) 등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다시 신라 땅 탐라(耽羅)로 이어졌으며, 고려로 이어져 제주(濟州)가 되었고, 고려 때 원(元) 나라에 의해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가 설치되었던 곳도 바로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역으로서 한반도 남쪽 제주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국 공자와 맹자는 탐라(제주)의 옛 땅 출신이었다는 말이 된다.
히햐! 공자, 맹자가 제주(탐라)의 옛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니...........
놀라운 사실이다.
[참고]
윤여동설 – 중국 산동성(山東省)은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빼앗은 전쟁배상지였고, 남제서 백제국전의 삭제된 부분은 바로 이 배상지에 관한 기록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위 : 남제서 고구려전의 건무3년(A.D.496) 이후 삭제된 기사]
[위 : 남제서 백제국전의 앞부문 삭제된 기사]
남제서 동이전 백제국(南齊書 東夷傳 百濟國)
“(남제서 백제국전 삭제부분)
..........................................................................공에 보답하고 열심히 노력한 것을 위로하여 그 이름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합니다. 가행영삭장군 신 저근(姐瑾) 등 네 사람은 충성스럽게도 온 힘을 기울여 국난을 없앴으니 그 뜻의 굳셈과 과감함이 명장의 등급에 오를만하며, 가히 나라의 간성이요 사직의 튼튼한 번병이라 할 만합니다. 그들의 노고를 헤아리고 공을 논한다면 의당 현격하게 나타나는 지위에 있어야 마땅하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가행직에 임명했습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은혜를 베푸시어 임시로 내린 관직을 정식으로 인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영삭장군 면중왕 저근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을 겸비하였으니 이제 가행관군장군 도장군 도한왕이라 하고,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는 젊은 시절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이제 가행영삭장군 아착왕으로 하며, 건위장군 여력(餘歷)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소박하며 문무가 뛰어나므로 이제 가행용양장군 매로왕이라 하고, 광무장군 여고(餘固)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국정을 빛나게 했으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불사후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모대(牟大 : 백제 동성왕)가 또 표문을 보내, “신이 파견한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高達)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楊茂)와 행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會邁) 등 3인은 지조와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심이 일찍부터 드러났습니다. 지난 태시(A.D.465~471) 중에 나란히 송나라의 조정에 사신으로 갔었고, 지금 신의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으니 그 지극한 공로를 따진다면 벼슬을 마땅히 올려 주어야 하므로 선례에 따라 가행직을 내렸습니다. 천자의 은혜는 신성하고 아름다워 만리 밖에까지 미치는 것인데, 하물며 스스로 천자의 뜰에 이르렀으니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바라오니 특별히 살피시어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고달은 변경에서의 공로가 이미 뚜렷하고 공무에 부지런하여 이제 가행용양장군 대방태수라 하고, 양무는 마음과 행동이 깨끗하고 한결 같아 항상 공무에 임하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광릉태수라 하며, 회매는 생각이 꼼꼼하고 빈틈이 없어 여러 번 근무의 성과를 나타내 이제 가행광무장군 청하태수라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이를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림과 동시에 장군의 호를 내리고 태수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백제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복야 손부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책명으로 모대(대륙백제 동성왕)를 죽은 그의 할아버지 모도(牟都 : 반도백제 모도왕)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봉하며 말하기를 “아 기쁘도다. 그대들은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대대로 이어받아서 그 정성이 먼 곳에까지 이르니 바닷길이 고요하고 맑아져 조공을 끊이지 않았다. 법전에 따라 귀한 관작을 계승하게 하노라. 삼가 아름다운 업을 지켜야할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에게 조서를 내리고, 모대를 그의 할아버지 모도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는다. 왕위에 오름에 장수(章綬: 인장과 끈) 다섯과 옥(玉), 동(銅), 호(虎), 죽(竹) 네 개의 부절을 내리니 왕이 이를 공손히 받는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해(A.D.490)에 위(북위)나라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역으로 쳐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의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 건무 2년(A.D.495) 모대(대륙백제 동성왕)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봉작을 받은 이래 대대로 조정의 왕화를 입었고, 또한 절부와 부월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앞서 저근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 받아 온 백성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A.D.490)에는 험윤(북위)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침입했으나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하게 하여 한밤중의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북위)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쓸려가듯 붕괴되었습니다. 그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예기가 꺾여 고래처럼 사납던 그 흉포함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사실은 사법명 등의 꾀에 의한 것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야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가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하고, 찬수류를 가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하며, 해례곤을 가행무위장군 불중후로 하고, 목간나는 과거에도 군공이 있으며, 또 성문과 배를 쳐부수었으므로 행광무장군 면중후라 하였습니다. 부디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와 겸참군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신 장색과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운 것을 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 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파도를 건너 그의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관작을 올려주어야 하겠으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성조에서 특별히 관작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하고 장군의 호를 내려 주었다.
위 남제서 백제국전을 보면, 앞 부분이 삭제된 상태로 전해지고 있는데, 필자가 연구해 본 결과 이 삭제된 기사부분은 바로 북위가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전쟁배상금으로 청주지역(옛 제나라지역) 땅을 백제에게 할양했다는 기록이 들어 있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중국의 치욕으로 판단하여 그를 감추기 위하여 삭제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대륙백제) 동성왕 때 백제와 북위는 분명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당시 북위의 도읍은 평성(현 대동)과 낙양이었고, 백제(대륙백제)의 도읍은 웅진 즉 지금의 북경 동쪽 청룡하 하류에 위치한 진황도 노룡이었다. 따라서 당시 백제와 북위의 국경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때 백제와 북위는 바로 그 부근에서 전쟁을 했을 것이고,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전하고 땅을 넓힌 후 그 지역을 다스릴 광릉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등을 새로이 임명했을 것이다.
☆ 백제가 동성왕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광릉태수, 청하태수 등을 임명한다는 것은 그 땅이 백제 땅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때 백제는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전한 후 전쟁배상금으로 이곳 청주지역을 빼앗았을 가능성이 많다. 필자가 보기에 남제서 백제국전의 삭제된 부문은 백제가 북위로부터 청주지역(지금의 산동성 일원)을 전쟁배상금으로 빼앗았다는 기사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곳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A.D.498) 조에 나타나는 탐라(탐모라) 즉 후일의 제주(濟州)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성왕이 남제에 표문을 보내 임명을 승인해달라고 한 청하태수(淸河太守)는 지금의 산동성 제남시 서북쪽이며 황하 북쪽에 위치한 하북성 청하현 부근을 다스릴 관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광릉태수(廣陵太守)는 청주(靑州)에 관한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보면, 남청주의 치소가 “광릉(廣陵)”이었다는 기록이 있어 필자는 동성왕이 말한 광릉태수는 남청주 즉 지금의 산동성 임기시 부근지역을 다스릴 관리를 임명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지금의 난하부근 노룡에 도읍하고 있던 백제(대륙백제)는 동진 말기에 요서군과 진평군을 차지하고 그를 기반으로 동성왕이 서남쪽에 위치했던 북위와의 전쟁에서 거듭 승리함으로써 점점 강역을 넓혀 가 영정하(옛 요수)와 황하하류를 건너 산동성 부근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18년(A.D.571) 조에, “북제의 후주가 또 왕을 임명하여 사지절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를 삼았다”는 기록이 이를 확인시켜 준다. 동청주는 지금의 산동성 동쪽 끝 부분인 산동반도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서 치소는 교주(膠州), 청도(靑島) 부근이었을 것인데, 동성왕(재위 : 479-501)보다 한참 후대인 위덕왕(재위 : 554-598)이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의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이때에 백제가 동청주 지역을 차지하고 통치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대륙백제)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고대의 요동(필자주 : 지금의 북경 일원) 동쪽 1천여리인 지금의 당산,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고, 동성왕 때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곳에서 남쪽으로 청주지역까지 강역을 넓혀 갔고, 위덕왕 때는 지금의 산동반도인 동청주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이는 백제 동성왕 때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전한 후 이 청주지역을 전쟁배상금으로 빼앗았기 때문일 것이며, 이로부터 백제는 해양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이러한 기록이 남겨 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때 백제는 난하 하류 부근의 대륙백제와 한반도의 반도백제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동성왕이 왕위에 오를 때인 479년에 반도백제는 동성왕의 할아버지인 모도왕(牟都王)이 왕위에 올라 있었고, 그 후 488년에 반도백제 모도왕은 죽었다. 그리하여 남제에서 동성왕에게 작위를 보내면서, 동성왕의 죽은 할아버지인 모도왕의 작위를 계승하게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가 지금의 산동성을 차지하게 되자 그 후 백제는 중간 지점인 지금의 산동성을 기착점으로 삼아 하북성의 대륙백제와 한반도의 반도백제 그리고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했던 고대의 왜국과 서쪽의 중국 사이를 오가며 무역을 함으로써 해양강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을 것이고, 후대 신라의 장보고도 그러한 연유로 그곳 산동반도 끝에 청해진과 적산법화원을 설치하고, 주변국과 무역을 함으로써 재력을 축적할 수 있었고, 신라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