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의 역사는 부여씨(扶餘氏), 해씨(解氏), 고씨(高氏)의 경쟁사 – 최초주장

윤여동 2022. 12. 24. 14:09

윤여동설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의 역사는 부여씨(扶餘氏), 해씨(解氏), 고씨(高氏)의 경쟁사 최초주장

 

 

한국 고대사 속 부여씨(扶餘氏), 해씨(解氏), 고씨(高氏)의 얽히고 설킨 미묘한 관계

 

고조선 단군왕검(檀君王儉

)

|

장자 부루(扶婁) : 고조선(왕검조선)의 왕위계승

차자 부소(扶蘇) : 진번 또는 맥으로 추정, 소씨(蘇氏)(?)

3자 부우(扶虞) : 진번 또는 맥으로 추정, 우씨(虞氏)(?)4자 부여(扶餘) : 부여의 후손들이 부여씨(扶餘氏)를 성씨로 삼고, 부여씨의 국가 부여(扶餘) 성립

 

북부여(北扶餘) 해모수(解慕漱)로부터 역사에 나타나는 해씨(解氏)는 고조선 단군왕검의 막내아들인 부여(扶餘)로부터 기인되었다고 판단되는 부여씨(扶餘氏)의 외손(外孫)으로 보이고,

실질적인 고구려의 건국시조로 추앙되는 해주몽(解朱蒙, 해추모라고도 한다)은 졸본부여 부여씨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고구려의 태조대왕 고궁(高宮)은 해주몽(解朱蒙)의 외손(外孫)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또한 신라왕실의 박씨(朴氏) 시조인 혁거세거서간도 동부여 왕실 해씨(解氏)의 외손(外孫)이었다. 왜냐하면 혁거세거서간의 어머니가 동부여 해부루왕의 공주인 해사소(解娑蘇, 해파소라고도 한다)였기 때문이다.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의 부여왕성 추정지]

 

[

적성현의 적성고루 :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여와 북부여 왕성의 고루 흔적

]

 

 

  원래 부여(扶餘)는 고조선(왕검조선)의 단군왕검께서 막내인 넷째아들 부여에게 나누어 주었던 나라 서쪽지역의 봉국이었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일원으로서 치소는 적성현(赤城縣)이었다.  그런데 고조선(古朝鮮) 말기의 혼란기인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解慕漱)라는 이가 부여(扶餘) 땅을 차지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부여씨가 아닌 해씨가 부여의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해모수는 부여 왕실 외손(外孫)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이암(李嵒)의 단군세기 47세 단군 고열가 58년 조를 보면, “이에 앞서 종실(宗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필자주 : 부여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던 고조선의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을 말하는 것이다)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임명하여 번조선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北扶餘)(필자주 : 사실 이때는 부여라 했을 것이고, 후일 부여의 직계 후손인 동명왕(東明王)이 부여의 남쪽지역을 차지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세운 이후 북쪽지역의 부여라는 의미로 북부여라 불리웠을 것이다)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필자주 : 원래는 구려였을 것이고, 후일 주몽(해주몽, 해추모) 왕의 외손인 고씨로써 최초로 고구려 왕위에 오른 6대 태조대왕 고궁(高宮)이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는 곧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B.C.261 해모수 출생

239 해모수 부여(북부여)의 왕위에 오름(23

)

이 해모수의 부여(북부여)가 한() 나라 건국에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 해모수는 부여왕실 외손의 자격으로 부여(북부여)의 왕위에 올랐을 것인데, 이는 후일 해모수의 친손이었던 주몽(해주몽, 해추모) 왕의 외손인 고씨(필자주 : 고구려 6대 태조대왕 고궁을 말한다)가 고구려의 왕위에 오를 때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5 해모수 천제 붕(67). 2대 해모수리 왕위계승170 북부여 2대 해모수리 붕. 3대 해해사 왕위계승

B.C.129 고조선 단군왕검의 넷째아들 부여(扶餘,夫餘)의 직계 후손인 동명(東明) 출생. 후일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후 맨 처음 이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고, 성씨를 부여씨로 삼는 것으로 보아 백제가 원래 부여의 직계후손 임이 틀림없다.

B.C.128

127

126

125

124

123

122

121 북부여 3대 해해사 붕. 4대 해우루 왕위계승

120

119

118

117

116

115

114

113

112

111

110

109 부여무서 출생108 이해는 중국의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킨 해로써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졸본부여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동명왕(東明王)(22

)

B.C.107

106

105

104

103

102

101

100

99

98

97

96 주몽의 어머니 하백의 딸 유화 출생

B.C. 95

94

93

92

91

90

89

88

87 북부여 4대 해우루 붕. 5대 해부루 왕위계승 86 졸본부여 동명왕이 천제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北扶餘)를 병합

이에 북부여의 해부루는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가섭원의 예()를 축출하고 그 땅에 동부여 건국.

동명왕 부여(졸본부여와 북부여를 통합)의 제위에 오름(44

)

B.C.85

84

83

82

81

80

79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고손자 해주몽 출생

78

77

76

75 졸본부여 부여무서 왕자의 둘째 딸 출생

74

73

72

71

70

69

68

67

66 연타발의 딸 연소서노 출생

65

64

63

62

B.C. 61

60 부여(졸본부여) 동명제(東明帝) (70). 부여무서왕 즉위(50

)

59

58 해주몽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부여로 도망침. 해주몽이 졸본부여 부여무서왕의 둘째공주와 혼인. 부여무서왕 붕. 주몽이 졸본부여 왕위계승(22).졸본부여 추모왕(해주몽왕)의 아들 해유리 동부여에서 출생.하백의 딸 주몽의 어머니 유화와 부인인 예씨 그리고 아들 유리는 동부여에 인질로 잡히게 되는데, 이로부터 유화는 35, 예씨와 유리는 40년간 인질생활을 하게 된다.

57

56 주몽왕과 졸본부여 둘째공주 사이에 딸 출생.(실명

)

성장 후 구려(句麗) 호족 고여달(고구려 6대 태조대왕의 고조)과 혼인.고구려왕들은 건국시조인 주몽왕은 해씨(解氏)였으나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그 이후의 고구려왕들은 모두 고씨(高氏)였다. 이는 고구려의 왕위가 해씨(건국시조 주몽왕 - 5대 모본왕까지)와 고씨(6대 태조대왕 - 28대 보장왕까지)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졌다는 말로서, 고구려의 왕위는 곧 주몽왕(추모왕)의 친손인 해씨와 외손인 고씨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진 것이다.

55

54

53

52

51

50

49 연소서노 졸본부여 왕족 부여우태와 혼인48 연소서노의 장자 부여비류 출생

47

46 연소서노의 차자 부여온조 출생.비류와 온조가 한 날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부여비류와 부여온조의 아버지 부여우태 훙

45

44

43 추모왕(주몽왕)과 아들 둘 딸린 청상과부 소서노가 재혼.이를 보면 앞서 주몽왕과 혼인했던 졸본부여 둘째공주가 딸(공주) 하나만 남겨 놓고 죽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고, 소서노는 주몽왕과 재혼함으로써 당시 후계자가 없었던 주몽왕의 뒤를 이어 자신의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42 그런데 재혼 후 주몽이 졸본에 인질로 잡혀 있는 아들 유리가 오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함. 이러한 말을 들은 소서노는 졸본부여에서는 자신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왕위에 올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어린 비류와 온조의 손을 잡고 졸본을 떠나 진번 땅에 가까운 한산(漢山) 부근으로 이주하게 된다.

41

40

39

38

37 북부여 해모수의 후예인 주몽이 부여(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로 개칭하고 고구려의 건국시조로 등극.

혹은 계속 부여(졸본부여)의 국호를 사용하다가 구려호족인 고씨에게 시집간 주몽왕의 딸의 후손이 왕위에 오른 6대 태조대왕(고궁) 때에 이르러 그때부터 고씨의 구려라는 의미로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36

35

34

33

32

31

B.C. 30

29

28

27

26

25

24 고구려 추모왕(주몽왕)의 어머니 하백녀 유화가 동부여에서 사망.

동부여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례지내고 신묘 건립

23

22

21

20

19 주몽왕의 아들 유리와 유리의 모친인 예씨부인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부여로 옴.추모왕(주몽왕) (61). 유리왕 왕위 계승(40

)

18 부여비류(31)와 부여온조(29)가 한산(漢山) 부근 미추홀과 위례성에 백제와 십제 건국

17

16

15

14

13

12

11

10

9

8

7

6 백제 태후 연소서노 훙(61

)

비류왕 또한 죽어 온조왕이 백제와 십제를 통합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함.

5 백제 온조왕이 도읍을 위례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김

4

3

2

1

A.D. 1

(이하 생략)

 

단군왕검의 넷째아들 부여왕가의 외손은 해모수였고, 친손은 동명이었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위에 올랐고, 동명왕은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해모수의 북부여를 멸망시켰고 멸망한 북부여는 북쪽으로 도망쳐 동부여가 되었고, 동부여 멸망후에는 그 일부가 또 북쪽으로 이동하여 두막루(물길북쪽, 실위동쪽)로 거듭났던 것으로 보인다. 두막루는 자신들이 옛 북부여의 후예임을 자처했기 때문에 위서(북위서)에 두막루가 옛 북부여라는 기록이 남겨졌을 것이다.  두막루는 8세기초까지 역사기록에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동명왕의 아들인 졸본부여 부여무서왕은 북부여 해모수의 친손인 해주몽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고, 후일 해주몽의 외손인 고궁(6대 태조대왕)이 고구려의 왕위에 올라 고궁의 후손이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갔다.

그리고 졸본부여 동명왕의 친손인 부여온조는 졸본을 떠나 진번 남쪽 한산 부근에 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그 직계후손으로 왕위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