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니하(泥河)와 우산성(牛山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기록 속에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역에 위치함으로써 공방전을 펼쳐야 했던 “니하(泥河)”와 “우산성(牛山城)”이 있으나,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대 지마이사금 14년(A.D.125)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으로 대부대로 몰려와서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더니 가을 7월에 또 대령책(大嶺柵)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넘었다.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5명의 장군을 보내 도우매 적병이 소문을 듣고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19대 눌지마립간 34년(A.D.450) 가을7월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 벌판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何瑟羅)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어 그를 엄습하여 죽였다.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내가 대왕과 함께 관계를 닦아 매우 기뻐하던 차에 이제 군사를 내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이니 이 무슨 도리인가?”하고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우리(신라)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니 그만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0대 장수왕 28년(A.D.450) 신라 사람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다. 왕이 화를 내어 군사를 출동시켜 치려하였더니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그만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0대 자비마립간 11년(A.D.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56년(A.D.468) 봄2월에 왕이 말갈의 군사 1만으로서 신라의 실직주성을 쳐서 빼앗았다.][필자주 : 이 고구려본기의 기록은 오기일 것이다. 신라가 실직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면 어찌 그 북쪽에 위치한 하슬라 사람을 동원하여 니하에 성을 쌓을 수 있었으랴. 잠깐 빼앗겼다고 하더라도 곧 신라가 도로 탈환했을 것이다]
가을9월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나이 15세 이상 되는 자를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니하(泥河)의 다른 이름은 니천(泥川)이다]
☆ 실직은 후일의 삼척이고, 니하(泥河)는 하슬라(후일의 명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강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1대 소지마립간 3년(A.D.481)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와서 호명 등 7개성을 빼앗고, 또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가는 것을 추격하여 니하(泥河)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 니하(泥河)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서, 동쪽은 신라 강역, 서쪽은 고구려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8년(A.D.496) 가을7월 고구려가 와서 우산성(牛山城)을 치므로 장군 실죽이 나가 니하(泥河)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1대 문자왕 5년(A.D.496) 가을7월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쳤더니 신라군사가 니하(泥河) 가에 나와서 반격하므로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9년(A.D.497)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6년(A.D.497) 가을8월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쳐서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2대 지증마립간 6년(A.D.505) 봄2월에 왕이 친히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로서 군주를 삼으니 군주란 이름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증마립간 13년(A.D.512) 여름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귀순하고 해마다 토산물로서 세공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필자주 : 옛 하슬라)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라고도 한다. 땅의 둘레가 1백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지증마립간 15년(A.D.514) 봄 정월에 소경(小京)을 아시촌(阿尸村)에 설치하였다. 가을7월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 이곳을 채웠다.
[니하와 우산성 추정지 좌표 : 동경121도05분50초 북위41도58분10초]
[요녕성 조양 북표시(北票市) 동북쪽 망우하(牤牛河)가의 황소머리 형상 지형 : 황소머리가 보이시나요?]
우리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은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이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실직주(悉直州)는 지금의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일원이었으며,
하슬라(명주)는 내몽골 통요시 고륜기(庫倫旗) 일원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였고,
백제의 도읍 웅진(熊津)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었다.
이때 신라, 고구려, 백제는 옛 동예(東濊)와 맥(貊)의 땅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역할을 했을 “니하(泥河)”는 지금 요녕성 북표시(北票市) 동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흘러 대릉하(백석수고)에 합류되는 망우하(牤牛河)로 보이는데, 지금도 이 망우하 강 옆에는 소머리 형태의 지형이 보인다.
“牤牛(망우)”라는 뜻이 황소라는 의미임을 볼 때, 그곳 지형이 마치 황소머리를 닮았기 때문에 후세에 강 이름이 니하(泥河)에서 망우하(牤牛河)로 바뀌었을 것이고, 우산성(牛山城)은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 동북쪽 망우하(牤牛河) 동쪽 오란산(烏蘭山) 부근에 쌓았을 것이다.
앞서 신라 20대 자비왕이 468년에 하슬라 사람들을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는 성이 바로 이 우산성(牛山城)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그리하여 신라와 고구려는 상호 공수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던 이 니하(泥河)와 우산성(牛山城)에서 공방을 펼쳤을 것인데, 497년에 이르러 결국 신라는 이 우산성(牛山城)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에게 요충지 중의 요충인 이 니하의 우산성을 빼앗김으로 해서 많은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기록인 신당서 발해 전을 보면,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大)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니하(泥河)를 경계로 삼고, 동쪽은 바다까지이며, 서쪽은 거란까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 신라와 발해의 국경도 바로 이 니하(泥河)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데,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가 니하(泥河)까지 회복했음을 알 수 있다.
니하(泥河)는 역사적으로 이렇듯 매우 중요한 강인데, 식민사관에 찌든 강단사학자들이 그 강이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조양시 북표(北票) 동북쪽 망우하(牤牛河)임을 어찌 꿈속에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으랴.
우리 강단사학의 억지논리는 사실 역사라고 할 수도 없고, 역사분탕질일 뿐이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대륙상고사와 고대사를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 지형에 억지로 꿰맞추어 해석하려니 어찌 들어맞을 수 있으리오.
한반도에 고구려, 신라는 없었고, 가야도 없었다.
한반도 경주와 김해에는 후한 광무제에게 쫓긴 흉노족들이 와서 왕국을 이루고 살았다.
☆ 요녕성 조양시 북표(北票)는 라마동고분군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북표는 영락 20년(A.D.410)에 고구려 호태왕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개선할 때 자발적으로 따라온 동부여 압로(鴨盧)들에게 주어졌던 땅이었고, 라마동고분군은 그들과 그 후손들이 살다 죽어 묻힌 흔적이다. 광개토대왕은 따라온 동부여 압로들을 신라와의 접경지역에 배치했던 것이다.
☆ 내몽골 적봉시 옹우특기는 옛 고려 동북9성의 함주(咸州)로 비정되는 곳인데, 그곳의 지형이 늙은 소의 머리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인지 지금은 옹우특기(翁牛特旗)로 지명이 바뀌어 있다.
[내몽골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 지긋이 눈을 감고 있는 나이든 소머리 형상이 보이시나요?]
☆ 그런데 삼국사기를 공부하다 보면, 고구려와 백제간의 접경지역에도 “우산성(牛山城)”이란 동일한 이름의 성이 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18년(A.D.540) 9월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원왕 10년(A.D.540) 9월 백제가 우산성(牛山城)을 포위했으나 왕이 정예병 5,000기를 보내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버렸다.]
설마 백제가 신라와 고구려 간에 공방전을 펼쳤던 실직, 하슬라(명주) 부근에 위치한 니하의 우산성을 침공했을 리가 없으니, 이때 고구려와 백제 간에 공방을 펼친 우산성(牛山城)은 이름만 같은 다른 우산성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