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압독국[押督國, 押梁國(압량국)이라고도 한다]의 진짜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태집둔(台集屯)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封泥)는 한사군(漢四郡) 시절 임둔군태수가 압독국(압량국) 왕에게 보낸 문서를 봉했던 흔적일 가능성이 많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함께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을 접대 책임자로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 만이 미천한 자를 책임자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종 탐하리로 하여금 한기부의 책임자 보제를 죽이게 하고는 돌아갔다. 그 종(탐하리)은 도망하여 읍즙벌주(音汁伐主) 타추간(陁鄒干)의 집에 의탁하였다.
(파사)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노비를 찾았지만 타추가 보내지 아니하였다.
이에 (파사)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스스로 무리와 함께 항복하였다.
실직(悉直)과 압독(押督)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음즙벌국(音汁伐國), 실직곡국(悉直谷國 : 悉直國), 압독국(押督國, 押梁國이라고도 한다) 등이 신라의 영향권 내에 들어오게 되어 신라가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신라의 서라벌(徐羅伐)은 한반도 경주(慶州)가 아니라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로 밝혀졌다. 그곳에 우리의 천년왕국 신라(新羅)가 있었다.
당시 한반도 경주에는 신라가 아니라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대륙에서 왕망의 신(新)나라에 적극 협조했다가 신(新)나라가 망하고, 후한 광무제에게 쫓기게 되자 대륙을 떠나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 왕국이 위치하고 있었다.
한반도 경주의 옛 고총들은 신라왕릉이 아니라 흉노족왕국의 왕들이 죽어 묻힌 곳이다. 이것이 우리 한반도 역사의 진실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기록에 언급되어 있는 신라 주변의 소국들은 발해 북쪽 대륙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실직곡국(悉直谷國, 悉直國)은 지금의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음즙벌국(音汁伐國)은 요녕성 부신시의 서남쪽 청하문구(淸河門區)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나라는 지금의 발해북쪽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필자주 : 이곳이 후일 삼척이 된다) 부근에서 국경을 다투다가 결국 두 나라 모두 신라에 복속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실직과 함께 신라에 복속해 왔다는 압독국(押督國, 押梁國이라고도 한다)은 지금의 어디쯤에 위치했던 나라였을까?
삼국사기 권제34 잡지제3 지리1(신라편) 장산군(獐山郡) 조를 보면, “장산군(獐山郡)은 지미왕(지마왕) 때 압량(압독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작은 나라를 탈취하여 군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하였는바 지금의 장산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산현(慶山縣) 건치연혁을 보면, “本押梁小國 一云押督(본래 압량소국이다, 일운 압독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경산현이 옛 압독국(압량국)이었음을 알 수 있고, 경덕왕 때 ”장산군(獐山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장산(獐山) 확대]
왜 경덕왕은 ”압독(압량)“이라는 옛 지명을 버리고 ”장산군(獐山郡)“으로 그곳의 지명을 바꾸었던 것일까?
“장산(獐山)”이란 “노루산”이라는 의미이다.
아마 그곳 압독국(압량국)의 산 중에 노루가 많았거나, 노루형상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찾고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가 출토된 태집둔(台集屯) 북쪽에 노루 머리 형상의 산이 있었다.
달구벌(達句伐)로 비정되는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북쪽 금성진(金星鎭)의 북서쪽 남표구(南票區) 지역이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경상도 경산(慶山)이 곧 옛 압독국(압량국)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라 천년도읍지 서라벌(徐羅伐)로 밝혀진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태집둔진(台集屯鎭) 부근을 옛 압독국(압량국)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곳 태집둔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 봉니(封泥)는 옛날 한사군(漢四郡) 시절 임둔군태수[필자주 : 임둔군은 하슬라(명주)지역에 설치되었던 한사군의 하나]가 압독국왕(압량국왕)에게 보낸 문서를 봉했던 흔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곳은 서쪽의 백제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김유신도 이곳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를 역임하기도 하였고, 통일신라 시기에는 압독국(압량국) 가까이에 위치한 달구벌(達句伐)로 도읍을 옮기려고까지 하였으니, 그 부근은 사람살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었던 곳임에 틀림없다.
특히 옛 압독국(압량국)이었을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남표구 태집둔(台集屯) 부근 지역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으로서, 앞에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고, 큰 강인 여아하(女兒河)가 흐르고 있어 농사짓기가 편리하다. 그래서인지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생활에 여유가 있고 인심도 좋은 편이다.
689년에 신라 신문왕이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더라면, 신라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하였을지 알 수 없지만,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관습법(慣習法)이라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내세워 무력화 시켰듯이, 당시 서라벌 부근의 호족들도 이런 저런 이유를 달아 도읍이전에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신라는 992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