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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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황룡사종(皇龍寺鐘)을 물에 빠뜨린 곳은 한반도 경주의 대종천(大鐘川)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소릉하(小凌河) 하류일 가능성

윤여동 2023. 6. 24. 16:36

윤여동설 신라 황룡사종(皇龍寺鐘)을 물에 빠뜨린 곳은 한반도 경주의 대종천(大鐘川)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소릉하(小凌河) 하류일 가능성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황룡사(皇龍寺) 장육 편을 보면,

  "신라 24대 진흥왕 재위 14년 계유(A.D.553) 2월에 용궁 남쪽에 궁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나자 이를 고쳐서 절을 짓고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 하고, 기축년(A.D.569)에 이르러 담장을 쌓아 드디어 17년 만에 완공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황룡사가 이때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에 황룡사종(皇龍寺鐘) 편을 보면,

 

  “신라 제35대 경덕대왕이 천보13(A.D.754) 갑오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였다. (: 길이) 13, (: 두께) 9, 무게 4975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이왕삼모부인이 했고, 장인(匠人 : 기술자)은 이상댁(里上宅)의 하전이었다(新羅 第三十五 景德大王 以天寶十三甲午 鑄皇龍寺鐘 長一丈三寸 厚九寸 入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一斤 施主孝貞伊王三毛夫人 匠人里上宅下典)“라고 기록되어 있어 황룡사 종이 어마어마하게 큰 종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고려 때 몽골군(원나라)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서라벌에 있던 황룡사(皇龍寺)는 불태웠고, 황룡사에 있던 종(황룡사종)은 몽골로 가져가려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종(황룡사종)을 배에 싣고 가다가 그만 동해바다에 빠뜨려버렸다고 한다.

종을 서라벌에서 하천을 통해 동해로 나온 후 해로를 통해 몽골로 가져가려 했다하여 이 하천을 대종천(大鐘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고,

  황룡사종을 한반도의 대종천과 동해바다가 만나는 봉길해수욕장이 있는 대왕암 부근에 빠뜨려 지금도 파도치는 날에는 바닷속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고도 하는데, 필자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은 한반도의 경주(慶州)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곳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중심으로 신라 천년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이지, 한반도에 신라(新羅)는 없었다.

  한반도 경주는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후한의 광무제에게 쫓기자 바다 건너 동쪽으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 왕국의 도읍이었다.

 

  따라서 신라 서라벌의 황룡사는 한반도 경주에 지었던 절이 아니라,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소릉하(小凌河) 강변에 위치했던 절이었으므로,

  몽골군이 정말로 황룡사종을 동해 바다에 빠뜨렸다면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지나 발해 요동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소릉하 하류이거나 발해의 요동만 부근에서 찾을 일이지,

  한반도 경상도의 대종천이나 동해 바닷가에서 찾을 일이 아닌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고려사 기록 속 역사의 현장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왜냐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 그리고 고려 역시 한반도에 있던 나라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빨리 눈을 떠라.

  우리의 대륙 역사 강역이 다 파헤쳐지고 있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