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이 알려주는 백제(百濟)의 진짜 강역 – 최초주장
[어머니가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 있어 부아악(負兒嶽)이라 불렸을 것인데, 이러한 형상이 한반도가 아닌 발해 북쪽 하북성 당산시 천안시 건창영진(建昌營鎭)에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곳(도읍할 만한 곳)을 살폈는데, 비류는 바닷가(필자주 : 미추홀을 말한다)가 좋겠다고 하였으나 열신하들이 간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대한수(北帶漢水)하고, 동거고악(東據高岳) 하며, 남망옥택(南望沃澤)이요, 서조대해(西阻大海) 하니, 이러한 천험의 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河南. 필자주 : 한수의 남쪽을 말한다)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신하로서 보좌를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니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3년(B.C.18)이었다.
............비류가 미추(미추홀)는 토습수함(土濕水鹹) 하여 편안하게 살 수가 없어 위례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이 완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럽고 한스러워 병이 나서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귀속하였다.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즐겁게 왔다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개칭하였다. 그의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로서 성씨를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건국 전 비류와 온조 그리고 열신하들이 “한산(漢山)의 부아악(負兒嶽)”이라는 산봉우리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비류는 하남의 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고는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버렸고, 온조는 신하들이 추천하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음을 알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비류는 나라를 이루는데 실패했고, 온조는 성공했다.
그렇다면 비류와 온조가 열신하들과 함께 올라 지세를 살펴보았다는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을 찾으면 바로 그 부근이 백제의 건국지일 것이다.
부아악(負兒嶽)이란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형상의 산이라는 의미인데, 과연 부아악은 지금의 어디에 있는 산일까?
한반도에 한산(漢山)이 있고, 그 산의 봉우리 중에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형상이 있는 부아악(負兒嶽)이란 산봉우리가 있을까?
안타깝게도 한반도에는 북한산이나 남한산은 있지만 사실 한산(漢山)이라는 산 자체가 없다. 그러하니 한산 부아악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발해 북쪽 지금의 북경 동쪽방향에 위치한 진황도 도산(都山. 필자주 : 백제 북한산이다)의 남쪽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천안시(遷安市) 건창영진(建昌營鎭)에 노군태(老君台)라고 하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 중에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백제 건국 설화 속“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으로서 백제는 바로 이 부아악을 중심으로 강역을 넓혀가 강국이 되었다.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를 가면 지금의 북경에 이른다. 지금의 북경이 고대의 요동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한서를 보면, “요동군(遼東郡)은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북경까지의 거리는 약 802 – 839km쯤이다.
고대에는 10리가 지금처럼 4km가 아니라 약 2.3km에 해당했다고 하니 환산해 보면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는 약 3,500- 3,600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산된다.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이 고대의 요동군(遼東郡)이었음을 알 수 있고, 기록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요동(遼東) 동쪽 천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북경에서 백제의 남한성(南漢城)으로 밝혀진 당산시 천안시 건창영진(建昌營鎭)까지의 도로거리가 254km로 나타나고, 북경에서 백제의 웅진(熊津)으로 밝혀진 진황도 노룡현(盧龍縣)까지의 도로거리는 234km로 나타나는데, 이를 고대의 거리 단위로 환산하면 약 1,100리, 1,000리쯤이 된다.
그리고 북경에서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으로 밝혀진 피서산장(열하행궁)이 있는 하북성 승덕시(承德市)까지의 도로거리가 226km로 나타나는데, 이를 환산하면 1,000리쯤이 된다.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했다는 사서의 기록들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 바로 옛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 필자주 : 중국 사서들에는 왕험성(王險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으로서, 위만조선의 도읍, 낙랑군의 치소로 활용되었고,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이 되었던 곳인데, 지금 이를 아는 역사학자가 없다.
이러한 백제를 한반도에서 건국지를 찾고 있었으니 지금까지 위례성도 찾을 수 없었고, 미추홀도 찾을 수 없었으며, 한성도 찾을 수 없었고, 엉뚱한 곳을 남한성, 웅진성, 사비성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온조백제는 한반도가 아닌 발해 북쪽 대륙에서 건국되고 그곳에서 678년 동안 존속하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고, 한반도에는 대륙에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하다가 패하고 한반도로 도망쳐온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가 별도로 존재했었다.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백제무광왕(百濟武廣王)”과 중국 사서 속에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동성왕의 할아버지 “백제모도왕(百濟牟都王)”을 반도백제의 왕으로 비정할 수 있을 뿐 아직 반도백제의 역년이나 왕위계승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강단사학자들은 무광왕의 반도백제 흔적을 대륙백제(온조백제)의 흔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으니 어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었으랴.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라, 가야의 역사라고 해석하는 한반도 경상도에 사실 신라, 가야는 없었다. 한반도 경상도에는 후한 광무제에게 쫓긴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인 흉노족들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 왕국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반도 경주, 김해 부근에서 유목민족의 문화흔적들이 발굴되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사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경상북도를 신라라 하고, 경상남도를 가야라 하고 있으니, 지금 강단사학자들이 반도사관에 의해 주장하는 우리의 모든 상고, 고대사는 솔직하게 역사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발해 북쪽 대륙에서 일어났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한반도로 가져와 억지로 한반도에 비정하여 엉터리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니까.
☆ 발해 북쪽 대륙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그곳을 떠나 한반도의 서울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한반도가 우리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대륙의 땅은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게 빼앗기게 되어 지금 우리는 수천년 역사가 이어진 발해 북쪽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역사강역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인데, 역시 이를 아는 역사학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