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백제 시조 온조왕 13년(B.C.6) 조의 백제 초기 강역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기사누락, 방향착오 등 오기(誤記) - 최초주장

윤여동 2023. 11. 24. 16:37

윤여동설 백제 시조 온조왕 13(B.C.6) 조의 백제 초기 강역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기사누락, 방향착오 등 오기(誤記) - 최초주장

 

 

 

  우리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3(B.C.6) 조를 보면,

  “왕의 어머니[필자주 : 소서노(召西奴)를 말한다]가 죽으니 나이가 61(B.C.66B.C.6)였다.

  여름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다.

  더구나 요즈음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사태가 불안하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의 남쪽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으니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여 영구히 평안할 계책을 도모하여야겠다하였다.

  가을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영역을 획정하니,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浿水)에 이르고[北至浿河],

  남쪽으로는 웅천(熊川)까지요[南限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西窮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까지로[東極走壤] 하였다.

  9월 성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14(B.C.5)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역사 연구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國家 東有樂浪 北有靺鞨.......]”라는 이 기록은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國家 東有新羅, 西有樂浪 北有靺鞨.....)라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보기에는,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라고 기록해야 할 것을 원고를 옮겨 적는 전사 과정에서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을 빼먹고 잘못 기록한 오기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백제(필자주 : 대륙백제를 말한다) 온조왕이 각 나라들이 위치한 방향도 모르고 말했을 리가 없고, 설사 온조왕이 순간적으로 말이 헛나와 잘못 말했다고 하더라도 사관들이 기록으로 남길 때는 그를 바로 잡아 기록해 놓았을 것이기 때문인데, 위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백제(대륙백제) 강역의 중심 산인 북한산(北漢山)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의 도산(都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낙랑군(樂浪郡)은 백제(대륙백제)의 서북쪽 방향인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필자주 : 이곳이 고조선의 왕검성으로서 전한낙랑군의 치소였으며, 고구려 평양성, 고려 서경이었던 곳이다)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고,

  백제(대륙백제) 강역의 동북쪽에는 맥(, 필자주 : 후일 신라의 우수주, 삭주가 된다. 지금의 요녕성 능원이다)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백제(대륙백제)의 동쪽에는 신라(新羅)와 변한(弁韓)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8(B.C.1) 조를 보면,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까지 갔다가 큰 눈을 만나 돌아오고 말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우수주()에 우두산성(牛頭山城)이 있었을 것이고, 또 그곳이 낙랑(필자주 : 낙랑동부도위 관할이었을 것이다) 땅이었음을 알 수 있어, 우두산성(牛頭山城)은 백제(대륙백제)의 초기 강역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대륙백제)의 북쪽에는 옥저(沃沮)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특히 옥저(필자주 :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가 있었다)에는 말갈족들이 많이 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말갈(靺鞨)이라 기록한 듯하다.

  어찌되었든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라고 온조왕이 말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백제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이 있어서....”의 오기 임에 틀림없다.

 

                                                          말갈

                                 말갈                                             맥

 

 

          낙랑                                                                                                 신라

                                                          백제

                                                        위례성                                               낙랑

                                                                        

 

[적색은 삼국사기 기록이고, 청색은 필자의 주장이다. 삼국사기 기록 속 낙랑의 위치가 필자의 주장과 반대 방향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온조왕이 말했다는 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잘못된 기록 한 줄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헷갈렸고, 지금도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인데, 알고 보니 좀 어이가 없긴 하다.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원고의 중간 기록을 빼먹고 전사했는데도, 우리가 지금까지 그를 모르고, 온조왕이 직접한 말이므로 매우 정확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온조왕을 탓할 사항이 아니라, 옛 기록을 전사하는 과정에서 나라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옥저)이 있어서 평안한 날이 적다라고 기록했어야 할 것을 [신라가 있고, 서쪽에]를 빼먹고 잘못 기록한 삼국사기 찬자 김부식을 나무랄 일이긴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김부식을 탓해 본들 무엇하랴.

  각설하고,

  지금부터는, 나라(대륙백제)의 동쪽에는 신라(新羅)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樂浪)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서 강역을 침공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다(國家 東有新羅 西有樂浪 北有靺鞨.........).”라고 고쳐 해석해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A.D.87) 조에, “가을7월 왕이 명을 내려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이 나라를 가져,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하였으나 덕망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어렵고, 위엄은 외국을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성새와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대륙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위치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온조왕 재위 13(B.C.6) 조에,

  “8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영역을 획정하니,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浿水)에 이르고[北至浿河],

  남쪽으로는 웅천(熊川)까지요[南限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西窮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까지로[東極走壤] 하였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방향이 조금 잘못 기록되어 있다.

 

[백제(대륙백제) 초기도읍 위례성(慰禮城)과 그 남쪽 방향으로 펼쳐진 평원과 발해]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지를 물색할 때 신하들이 위례성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하면서 건의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北帶漢水(북대한수) 하고, 東據高岳(동거고악) 하며, 南望沃澤(남망옥택) 하고, 西阻大海(서조대해) 했다고 하면서 위례성이 도읍지로서 적당하다고 건의를 했었는데, 이 중 西阻大海(서조대해) 즉 서쪽의 대해는 발해를 말했던 것이 아니라 아마 패수(浿水)를 말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북쪽의 패수(浿水)”란 지금의 난하(灤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난하는 백제(대륙백제) 건국 초기 강역의 서쪽, 서남쪽, 남쪽까지 이어진 강이고,

  “남쪽의 웅천(熊川)”이란 지금의 청룡하(靑龍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청룡하는 백제(대륙백제) 건국 초기 강역의 북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돌아 동남쪽까지 길게 이어진 강으로서 백제의 동쪽 국경이었으며,

  “서쪽의 대해(大海)”란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 발해는 백제(대륙백제) 건국 초기 강역의 동남쪽, 남쪽 방향에 위치한 바다였다. 따라서 이 당시의 대해란 아마 패수(浿水)와 웅천(熊川)이 합류하는 지점인 웅진구(熊津口)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패수(지금의 난하)와 웅천(지금의 청룡하)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사비 동쪽을 지나게 되는데, 백제 사람들은 사비를 지나는 그 강을 사비하, 백강(白江, 필자주 : 혹은 백촌강, 백마강이라고도 불렀다)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수가 사비 남쪽 기벌포 부근까지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쪽의 주양(走壤)”은 우수주(맥국, 수약주)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백제(대륙백제) 건국 초기 북쪽 경계를 말한 것이라면, 지금의 하북성 평천현(平泉縣) 와룡진(臥龍鎭)에서 황토량자진(黃土梁子鎭)으로 넘어가는 고개 부근을 말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필자주 : 백제왕들의 사냥터 구원 부근을 말하는 듯하다]

  즉 이때 백제(대륙백제)의 강역을,

  “서쪽으로는 패하(浿河, 패수)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웅천(熊川)까지요,

  남쪽으로는 대해(大海, 웅진구)에 닿고,

  북쪽으로는 주양(走壤)까지로 하였다.”라고 기록했어야 옳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원래의 삼국사기 기록과 수정한 결과에 따라 그 위치를 그려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패수]

                                               주양

 

 

                                              백제

[대해] 패수                            남한성                              웅천 [주양]

 

 

 

                                           대해(웅진구)

                                              [웅천]

 

[적색은 삼국사기 기록이고, 청색은 필자가 바로 잡은 것인데, 위치와 방향이 서로 정확히 90도가 어긋나 있다. 따라서 이 기록 역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방향을 어긋나게 잘못 기록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3(A.D.673) 조를 보면, “9월 국원성(國原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주양성(首若州走壤城), 달함군주잠성(達含郡主岑城), 거열주만흥사산성(居烈州萬興寺山城), 삽량주골쟁현성(歃良州骨爭峴城)을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수약주(맥국, 우수주, 삭주, 춘주)에 주양성을 쌓았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곧 백제 초기 강역이었던 주양이 수약주(맥국, 우수주)에 가까이 위치했다는 의미이다.

 

위 그림을 참조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