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와 백제(대륙백제)가 200년간 다투었던 쟁탈지 찾기 - 최초주장
고구려
통전에 의하면,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B.C.37)에 북쪽의 부여(동부여)로부터 동남방으로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고(高)로서 성을 삼았다”고 하였으며, 고기에는 이르기를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흘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곳인 듯하다.[필자주 : 주몽은 기원전 79년생으로서 22세 때인 기원전 58년 봄에 동부여로부터 졸본으로 도망쳐 와서 졸본부여 왕의 둘째 사위가 되었다가 그해 10월에 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성씨는 해(解)씨였다. 졸본은 풍광이 아주 좋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의 국호는 졸본부여(卒本扶餘)였을 것이고, 2대 유리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고구려(高句麗) 라는 국호를 사용했거나 6대 태조대왕 고궁(高宮)이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를 사용했을 것이다]
한서지에 이르기를 “요동군(遼東郡)은 낙양과의 거리가 3,600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 무려현(無慮縣)이 있었으니 곧 주례에 이른 바 북진의무려산(北鎭醫巫閭山)이다.[필자주 : 無慮(무려)와 巫閭(무려)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잘 이해 되지 않는다] 대요(大遼)에서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했다.[필자주 : 지금의 북진 의무려산은 가짜로서 명, 청 시기에 인위적으로 지명을 이동시킨 결과이다. 원래의 진짜 의무려산은 북경 방산에 있는 상방산(上方山)이다]
현토군(玄菟郡)은 낙양에서 동북으로 4천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이 셋으로서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소위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성, 졸본이 아마 한(漢)나라 현토군의 경내이며, 대요국(요나라) 동경(東京)의 서쪽인 듯하니 한서지의 소위 현토속현 고구려가 이것인가 싶다.[필자주 :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이고, 현토군은 지금의 북경 서북쪽 장가구시 회안성진(懷安城鎭)으로 비정된다]
옛날 대요(요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遼)의 임금이 연경(燕京)에 있었는데, 우리(고려)의 입조 사신들이 요나라의 동경(東京)을 통과하고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醫州)에 당도하여 연경(燕京) 계주(薊州)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음을 알 수 있다.[필자주 : 요나라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지금의 북경을 말하는 것이고,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을 말하는 것이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을 지나서 유류왕 22년에 도읍을 국내성[혹은 위나암성이라고도 하고, 혹은 불이성이라고도 한다]으로 옮겼다.
한서에 의하면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불이현(不而縣)이 있고 또 총장2년에 영국공 이적이 칙명에 의하여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하였는데, 목록에 이르기를 압록강(鴨綠江)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11개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國內城)이며, 평양으로부터 여기까지 17개 역이 있었으니, 이 성도 역시 북조 경내에 있었을 것이나 다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을 뿐이다.[필자주 : 고구려의 국내성은 북경 연경현 영녕진(永寧鎭)을 말하는 것이다]
국내성(國內城)에 도읍한 지 425년을 지난[필자주 : 11대 동천왕 21년인 서기 247년에 관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불타자 이때 이미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었다. 장수왕때 처음으로 평양성으로 옮긴 것이 아니다] 장수왕 15년에 평양성(平壤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평양성에서 156년을 지난 평원왕 28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을 지나 보장왕 27년에 멸망하였다.[필자주 : 산상왕 때의 환도성(丸都城)과 고국원왕 때의 황성(黃城)으로 이도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주) 옛 사람들의 기록에 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연대가 이처럼 분명한데 혹자는 말하기를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동쪽 황성(黃城)으로 옮겼고 그 성이 지금 서경(평양)의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바 그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다.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서경이고 패수(浿水)는 바로 대동강(大同江)인 듯한데, 무엇으로 그를 알 수 있느냐 하면, 당서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한(漢) 낙랑군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성을 쌓았고, 남쪽으로 패수가 흐른다”고 하였으며, 지리지에 이르기를 “등주에서 동북쪽 바다길로 나서서 남쪽으로 해변을 따라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를 지나면 그 서북쪽이 신라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수양제의 동방 정벌 조서에 “창해방면 군사는 배가 천리에 뻗쳤는데, 높직한 돛들은 번개처럼 달리고, 커다란 전함들은 구름같이 날아서 패강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에 이르다”는 말이 있으니 이 말에 의하면,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 것이 명백하며 바로 서경이 평양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당서에 이르기를, “평양성을 장안이라고도 하였다”고 하였으나, 고기(古記)에는 평양(平壤)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니 두 성이 같은지 다른지,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운지 알 수가 없다.[필자주 : 같은 평양 시내에서 궁궐의 위치만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 살다가 얼마 후 차츰 동쪽 패수 옆으로 옮겨왔는데, 발해 사람 무예가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 전성시기에 군사 30만으로 당나라와 대항하여 적수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 지세가 유리하고 군사가 강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말기에 이르러 임금과 신하가 우매하여 자기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하니 당나라가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출동하였고, 신라가 협력하여 그를 쳐서 평정했던 것이다.[필자주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지금 북경 북쪽인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이고, 국내성은 북경 연경구 영녕진(永寧鎭)이며, 환도성은 북경 회유구 발해진(渤海鎭)이고,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이며, 패수는 지금의 난하(灤河)를 말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겨왔다는 말이 옳다]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와 말갈로 편입되고 신라에서도 그 남쪽 지경을 차지하여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세 주를 설치하였고, 그 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함으로써 아홉주를 채웠다.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편]
백제
후한서에 이르기를 “삼한은 대개 78개국이었는데 백제가 바로 그 중 하나의 나라이다”라고 하였으며, 북사에는 “백제가 동쪽으로는 신라, 서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를 한계로 하였으며, 북쪽은 한강(漢江)에 닿았고, 그 도읍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 하였으며, 그 밖으로 오방성이 있다”고 하였고, 통전에는 이르기를 “백제가 남쪽으로는 신라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한계로 하였다”고 하였으며, 구당서에는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동북쪽에 신라(新羅)가 있으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倭)에 이르며, 북쪽에 고구려가 있고, 그 나라 왕이 사는 곳에는 동, 서 두 성이 있었다”고 하였고, 신당서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요, 남쪽은 왜(倭)인데, 모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쪽이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
[필자주 : 대륙백제의 도읍 웅진성(熊津城)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고, 사비성(泗沘城)은 하북성 당산시 난주(灤州, 난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도백제의 도읍 고마성(固麻城)은 한반도 충남 공주를 말하는 것이고, 거발성(居拔城)은 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 중국 사가들도 반도백제와 대륙백제를 헷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중국에 백제 사신들이 왔을 때 물어보면, 어떤 때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쪽에 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중국 월주의 동쪽 바다 건너에 있다고도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사관들이 반도백제(한반도)와 대륙백제(발해 북쪽)를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한 채 기록을 남겨 놓아, 뒤섞여진 사서의 기록들이 역사연구자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고전의 기록에 의하면, “동명왕의 셋째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 3년(B.C.18) 계묘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으로 가서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기원전 5년에 다시 도읍을 남한성(南漢城)으로 옮겼는데, 건국한 때로부터) 389년을 지난 13대 근초고왕 때인 (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하평양)을 빼앗고, 한성(漢城)에 도읍을 정하여 105년을 지냈으며, 22대 문주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웅천(웅진)으로 옮겨 63년을 지냈으며, 26대 성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고,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2년을 지냈다.
당나라 현경5년(A.D.660)은 바로 의자왕 재위 20년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라 유신(김유신)이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쳐서 평정하였다.
[필자주 : 온조왕은 주몽왕(추모왕)의 셋째 아들이 아니라 사실은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東明王)의 증손자로서, 아버지는 부여우태이고, 어머니는 소서노였다. 어릴 때 그 어머니 손에 이끌려 졸본을 떠나 진번 남쪽 마한의 한산(漢山) 아래로 와서 자리 잡고 살면서 그 부근의 땅을 개척한 후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왕위에 올라 백제의 건국 시조가 되었고, 온조왕 14년(B.C.5년) 정월에 남한성(南漢城)으로 옮겼다. 13대 근초고왕 26년인 371년에 이르러 백제가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며 승리하고 난 후 북한산 아래 한성(漢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백제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까지 빼앗았다는 것인데,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이고, 남평양(南平壤)은 승덕시의 동남쪽 승덕현(承德縣)을 말하는 것이다]
옛날 백제에는 5부가 있어 37개군, 200개 성, 76만호를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당나라에서 그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등 다섯 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그곳 추장들로써 도독부 자사를 삼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가 그 지역을 전부 병합하고,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등 세 개 주와 군현을 설치하고 그와 더불어 고구려 남쪽 지역과 신라의 본토를 아홉 개 주로 삼았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백제 편]
윗 글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에 대한 위치와 연혁 등에 관한 것인데, 세밀히 연구해 보면 대개는 옳으나, 중간 중간 잘못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 이후 약 400년 정도는 전쟁 기록이 없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중간지역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고구려 미천왕이 그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우리 강역에서 축출하게 되자 고구려와 백제는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된다.
그리하여 고구려 미천왕의 아들인 16대 고국원왕 때부터 고구려와 백제 간에 영토전쟁이 무려 200년 가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39년(A.D.369) “가을9월 군사 2만으로 남쪽의 백제를 쳤는데, 치양에서 싸우다가 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치양(雉壤)이란 수곡성(水谷城)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 백제가 천혜의 요새지인 수곡성(水谷城)까지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그로부터 2년 뒤인 371년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직접 군사 3만을 이끌고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을 침공하게 되고,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며칠 후 죽게 되고,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이때 백제가 수곡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까지를 빼앗고, 도읍을 한산(漢山, 필자주 : 북한산 남쪽 한성이다)으로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고 만다.
☆ 이때 대륙백제의 중심강역은 지금 발해 북쪽의 진황도 도산(都山) 부근인데, 이 진황도 도산이 백제의 북한산(北漢山)이었다.
그리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의 아들인 소수림왕이 왕위에 올라 있을 때인 377년에 백제 근초고왕의 아들인 근구수왕이 다시 한번 군사 3만으로서 평양성을 침공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고구려 소수림왕도 역시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소수림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그 동생인 고국양왕이 왕위에 올라 중국의 요동군(遼東郡)과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빼앗아 차지하게 되는데, 이가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고국양왕은 왕위에 오른 후 중국 세력들과의 전쟁 때문에 백제와의 국경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백제는 이 틈을 타서 고구려 남쪽 국경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괴롭히게 된다.
그렇게 고국양왕도 죽고 그 아들인 고구려 광개토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광개토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392년 7월에 남쪽의 백제를 쳐서 석현성 등 10여개 성을 빼앗는데, 이는 아마 태자 시절부터 골치아픈 백제를 눈여겨 보고 있다가 침공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때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백제에게 빼앗겼던 성을 탈환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10월에 이르러 다시 한번 백제를 침공하여 천혜의 요새지인 백제 관미성(關彌城)까지 빼앗게 되는데, 그 후 해마다 두 나라 간에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해가 없었다. 그러자, 396년에 이르러서는 작심하고 고구려 광개토왕이 몸소 군사들을 이끌고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을 침공하게 되고, 성이 함락 지경에 이르자 백제 아신왕은 스스로 광개토왕 앞에 나아가 무릎굻고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다는 맹세를 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호태왕비문에는 이때 고구려가 58개성, 700개촌을 빼앗았고, 장수들과 백제 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고 개선했다고 하였으니 이때 백제는 한산(漢山) 이북 땅 거의 전부를 고구려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필자주 : 이때 광개토왕은 아신왕에게 앞으로 명령에 잘 따르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으나 한성을 빼앗지는 않았는데, 혹시 아신왕이 같은 나이 또래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호태왕 비문 영락 6년(A.D.396) 병신년 조
百殘新羅舊是屬民
백잔과 신라는 옛날 (우리의) 속민이었다
由來朝貢
그런 이유로 조공을 바쳐왔다
而(倦)以辛卯年來
그런데 신묘년이래 (조공 바치는 것을) 게을리 하였다
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바다를 건너 백잔...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만들기 위하여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軍至窠南攻取 軍至窠南攻取 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于氐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濔城 奧利城 勾☆城 古模耶羅城 須鄒城 ☆☆城 ☆而耶羅城) 瑑城 於利城 ☆☆城 豆奴城 農賣城 沸城 比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漢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赤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芑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從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曾拔城 宗古盧城 仇天城 ☆☆ ☆☆ 逼其國城
우리 군사가 남쪽 그들의 보금자리를 쳐 일팔성(壹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우저리성(于氐利城) ☆☆성(☆☆城) 각미성(閣彌城)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고사조성(古舍蔦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미성(雜濔城) 오리성(奧利城) 구☆성(勾☆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수추성(須鄒城) ☆☆성(☆☆城) ☆이야라성(☆而耶羅城) 전성(瑑城) 어리성(於利城) ☆☆성(☆☆城) 두노성(豆奴城) 농매성(農賣城) 비성(沸城) 비리성(比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대산한성(大山漢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城) 누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적성(蘇赤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기성(巖門芑城) 임성(林城) ☆☆☆(☆☆☆) ☆☆☆(☆☆☆) ☆리성(☆利城) 취추성(就鄒城) 종발성(從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彡穰城) 증발성(曾拔城) 종고로성(宗古盧城) 구천성(仇天城) ☆☆(☆☆) ☆☆(☆☆)을 빼앗으며, 그 나라의 국성(國城)인 도읍에 바짝 접근했다
殘不服義 敢出迎戰
(백)잔주가 태왕의 뜻에 불복하고 감히 나와 맞아 싸웠다
王威赫怒 渡阿利水遣刺迫城
왕이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빠르게 진군시켜 성에 육박하였다
殘兵歸穴 就便圍城
(백)잔병이 소굴로 돌아가므로 성을 포위했다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백)잔주가 곤경에 처해 남녀 1천명 세포 1천 필을 바치며
跪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왕 앞에 무릎 꿇고 스스로“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太王恩赦 始迷之愆錄 其後順之誠
태왕이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고 약속한대로 그 후 성의 있게 순종하는지를 지켜보겠노라 하였다.
於是得 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이때 58개 성, 7백개 촌, 장수와 (백)잔주의 동생 그리고 대신 10명을 얻었다
旋師還都
개선하여 도읍으로 돌아왔다
한편 땅은 뺏길 대로 왕창 빼앗겼고, 같은 나이 또래의 광개토왕에게 무릎꿇고 맹세하는 망신을 당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백제 아신왕은 태자인 전지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왜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고구려에 빼앗긴 성들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결국에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고 마는데, 8년 후 고구려의 광개토왕도 젊은 나이에 죽고 그 아들인 장수왕이 왕위를 잇게 된다.
장수왕은 재위 초기에는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서 그랬는지, 그곳으로 신경을 집중해서 그랬는지 한동안 백제와의 전쟁 기록이 사라졌다가 재위 63년인 475년에 이르러서야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을 함락시키며, 백제 개로왕을 잡아 죽임으로써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남녀 8천명의 포로를 잡고 돌아오게 되는데, 이후 백제는 한성(漢城)을 잃게 됨으로 해서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문주왕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겨야 했는데, 재위 3년 만에 시해당하고 그 아들 삼근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 삼근왕도 재위 3년에 15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 대륙백제의 문주왕과 반도백제 모도왕의 아들인 곤지가 대륙에서 시해당하는 것은 사실 백제는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개로왕 때부터 두 백제의 통합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이에 반대한 대륙백제의 외척 해씨들의 반대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이를 다시 추진하자 해씨들이 문주왕과 곤지를 모두 죽여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이 대륙백제의 삼근왕과 해씨들을 제거해 버리고,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게 된다.
그리고는 둘째손자인 모대를 대륙백제으로 보내 왕위에 올리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고, 다시 그 뒤를 이어 동성왕의 동생인 무령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며, 무령왕의 아들이 성왕이고, 성왕의 아들이 위덕왕인 것이다.
이를 보면, 사실 대륙백제는 660년인 의자왕 때 멸망했던 것이 아니라 삼근왕 때인 479년에 이미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 이후는 반도백제의 제후국으로서의 대륙백제였다.
그런데 이때 무광왕이 365년경 한반도에 세운 반도백제가 강국으로 부상해 있어 두 백제의 통합을 이루게 되어 대륙백제는 다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동성왕 때 대륙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동성왕, 무령왕 대에 고구려 광개토왕, 장수왕에게 빼앗겼던 한성(漢城)과 북한산 북쪽의 구원(狗原)까지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인데, 성왕 때인 554년에 이르러 신라와의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왕이 잡혀 죽고, 처절하게 패배함으로써 그 땅을 다시 잃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사비에서 나당 연합군에 의해 678년 사직을 문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두 나라 간에 200년 가까이 피터지게 다투었던 땅은 남평양(南平壤)으로부터 옛 수곡성(水谷城)을 지나 관미성(關彌城) 부근까지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의 발해 북쪽 하북성 승덕현(承德縣)으로부터 관성현(寬城縣)을 지나 남쪽으로 천서현(遷西縣) 부근까지 난하 중류 동쪽의 땅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땅이 후세 고려 개경(開京)이 되고, 고려 삼별초가 원나라에 항몽했던 강화(江華)가 되고, 팔만대장경의 판각지가 되니 이러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이를 아는 역사학자가 없으니 이는 또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그야말로 난감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