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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國內)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3. 12. 22. 15:43

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國內)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국내 동쪽 위나암산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21(A.D.2) 조를 보면, “3월에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왕이 장생 설지로 하여금 쫓아가게 하였더니, 국내(國內)의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아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도록 하고는, 돌아와 왕에게 보고하기를, ”제가 돼지를 쫓아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갔더니, 그곳의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신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전쟁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9월 왕이 국내(國內)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22(A.D.3) 겨울10월 왕이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3대 대무신왕 11(A.D.28) 조를 보면, (, 후한) 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왕이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펼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 왕이 살던 국내왕궁(國內王宮)은 별도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보호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내(國內)의 시가지에 일반백성들과 함께 담장만 치고 섞여 살다가, 비상시에만 산성(山城)으로 들어가 적을 방어했던 것으로 판단되고, 국내왕궁(國內王宮)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쌓았을 위나암성(尉那巖城)이 바로 비상시를 대비한 산성(山城)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랬다가 10대 산상왕 2(A.D.198) 2월에 이르러 환도성(丸都城)을 쌓고, 13(A.D.209) 겨울10월에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때 산상왕은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겨 중원(中原)으로의 진출을 도모하려 했을 것이다.

 

환도성(丸都城)과 위나암성(尉那巖城)이 동일한 곳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서기 198년에 쌓은 환도성과 서기 3년에 쌓은 위나암성이 어떻게 같은 성일 수 있겠는가.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위나암성과 환도성은 전혀 다른 별개의 성이고, 환도성(丸都城)은 후일 안시성(安市城)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가 국내(國內)에 도읍했던 시기는 서기 310월부터 209년까지 206년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2대 유리왕 재위 2210월부터,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 6대 태조대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 9대 고국천왕, 10대 산상왕 재위 139월까지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그런데 16대 고국원왕 12(A.D.342) 조를 보면, 2월 환도성(丸都城)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國內城)을 쌓았다[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산성인 위나암성(尉那巖城)과는 별도로 국내에 왕성(王城)을 쌓고, 국내성(國內城)이라 명명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국내성(國內城)이라는 명칭은 342년 이후부터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생각되고, 그 이전은 그냥 국내왕궁(國內王宮)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고구려는 옛 도읍인 국내성(國內城)과 장수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성(漢城) 그리고 당시의 도읍인 평양성(平壤城)을 삼경(三京)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국내성은 도읍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관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졸본(후성진) 풍광. 좌표 : 동경1160353초 북위404133]

 

[342년 고국원왕 때에 이르러 쌓은 고구려 국내성(연경현 영녕진), 좌표 : 동경1160935초 북위403125]

 

 

[고구려 두 번째 도읍 국내성이었던 고색창연한 영녕진 영녕고성 내 시가지.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영녕고성이 옛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이었음은 모르고 있었고, 옛날 국내성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을 고루(鼓樓)는 엉뚱하게도 도교사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위나암성 추정지(연경현 영녕진 동쪽 북구촌), 좌표 : 동경1161312, 북위403158]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 초기 왕들이 비상시에 들어가 방어했을 위나암성(尉那巖城, 필자주 : 위나암산성이다)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卒本, 홀본이라고도 한다)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이고, 국내성(國內城)은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永寧鎭)의 영녕고성(永寧古城)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고구려 유리왕이 도읍을 졸본으로부터 국내로 옮기고 쌓았다는 위나암성(尉那巖城)은 국내왕궁(國內王宮)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성이었을 것인데, 지금의 영녕진 동쪽 북구촌(北泃村)으로 비정된다.

  이곳 북구촌은 산성을 축성하기 좋은 천혜의 지형으로서, 급경사를 이룬 돌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고, 내부는 비교적 평평하고 넓은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으며, 입구는 한곳으로서 동남쪽에 있고, 왕궁인 국내로부터 동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비상시에 왕이 빨리 그곳으로 들어가 적을 방어할 수 있는 등 산성의 입지로서의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고구려 초기에 쌓았고, 고구려 초기왕들이 그곳으로 들어가 적의 침공을 방어했던 위나암성(尉那巖城)을 드디어 필자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찾아낸 것이다.

  지금 북경 북쪽 연경현(延慶縣)의 영녕진(永寧鎭) 일원이 우리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 국내(國內)였, 그 동쪽 가까운 곳이 위나암성(尉那巖城)이었던 것이다.

  그곳은 우리의 고구려 옛 땅인 것이다.

 

 

 

 

 

  여러분들도 중국 북경에 가실 기회가 있으시면, 팔달령장성만 구경하지 마시고, 그 너머 멀지도 않은 곳에 위치한 고구려 국내성이었던 영녕고성도 둘러보시고[필자주 : 조금은 실망하실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가 역사에서 사라진 지 1천년 하고도 35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을 감안하시고 둘러보시면 감회가 새로울 것입니다] 또 그 동쪽 위나암성터도 가보시면, 그곳이 고구려 땅이었음을 전혀 몰랐을 때와는 감회가 아주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 연경에는 용경협(龍慶峽)이라는 협곡도 있는데, 웅장하고 경치가 매우 좋은 곳으로서 강물을 댐으로 막아 배를 타고 구경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고, 

  또 고애거(古崖居)라는 선사인들이 바위에 굴을 파고 살았던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에서 고구려(高句麗)를 찾지 마세요.

  길림성 통화시 집안(集安)은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이 아니고, 

  지금의 요하(遼河)는 옛 요수(遼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요하 동쪽 요동반도(遼東半島)는 고대 왜국(倭國)이었습니다.

  왕들이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의 작위를 받았던 고구려는,

  고대 요동군(遼東郡)이었던 지금의 북경 북쪽에서 건국되었고,

  역사 내내 중국 세력들과 그 요동 땅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국력이 강할 때는 그 땅을 빼앗았다가, 약해지면 그 땅을 잃기를 반복했지요.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고구려 역사의 비밀은 천년이 지나도 절대 풀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