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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國內) 부근 두곡이궁(豆谷離宮)과 두곡동원(豆谷東原) 유리왕릉 조성지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3. 12. 30. 21:18

윤여동설 고구려 국내(國內) 부근 두곡이궁(豆谷離宮)과 두곡동원(豆谷東原) 유리왕릉 조성지를 찾았다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22(A.D.3) 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 국내성(國內城) 자체는 한참 후대인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에 쌓았다고 했으므로 유리왕 당시에는 국내성이라는 성은 없었고, 다만 국내에 왕궁과 비상시를 대비한 산성인 위나암성만 있었다.

 

유리왕 29(A.D.10) 조를 보면, “가을7월에 두곡(豆谷)에 이궁[離宮, 필자주 : 이궁(離宮)이란 본궁(本宮)과 멀리 떨어진 별장형태의 궁실을 말하는 듯하다]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유리왕 37(A.D.18) 조를 보면, “가을7월 왕이 두곡(豆谷, 필자주 : 두곡이궁을 말한다)으로 갔다.

겨울10월 왕이 두곡이궁(豆谷離宮)에서 죽었다.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琉璃明王)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두곡(豆谷)”이라는 곳이 계속적으로 언급되는데, 두곡(豆谷)이라는 지명을 보면, 이곳은 계곡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유리왕이 경치 좋은 두곡(豆谷)에 이궁(離宮)을 짓도록 직접 명했을 것인데, 유리왕은 말년에 이르러 중병에 걸려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는지, 왕궁을 떠나  두곡이궁(豆谷離宮)으로 갔고, 3개월 후  그곳에서 죽었으며, 또 그 두곡동원(豆谷東原)에 묻혔으니, 유리왕은 생전에 이곳 두곡(豆谷)을 매우 좋아했던 듯하다.

그리고 유리왕은 자신이 죽거든 경치좋은 그 두곡 부근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는지 아들인 고구려 대무신왕은 그 아버지 유리왕의 능을 그 두곡의 동쪽 벌판에 조성했는데, 아직까지 그 두곡(豆谷)이 어디를 말하는지, 두곡이궁(豆谷離宮)을 어디에 지었는지, 두곡동원(豆谷東原)이 어디를 말하는지 밝힌 사람이 없었다.

 

 

[: 북경시 연경현(延慶縣)의 관할 표시인데, 이곳 영녕진(永寧鎭)이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이었고, 이 부근의 두곡동원(豆谷東原)에 고구려 2대 유리왕릉이, 대수촌원(大獸村原)3대 대무신왕릉이, 민중원석굴(閔中原石窟)에 4대 민중왕릉이 조성되었다]

 

[위 : 고구려 국내성(연경현 영녕진 영녕고성)]

 

[봄, 가을의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 용경협(龍慶峽)]

 

 

[고구려 두곡이궁터(현 용경협 입구)(좌표 : 동경116도00분17초 북위40도32분44초)]

 

[고구려 두곡동원의 유리왕릉(용경협 입구 동쪽)(좌표 : 동경116도00분36초 북위40도32분42초)] 

 

그렇다면 고구려 국내의 두곡(豆谷)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필자는 수년간의 탐사 끝에 결국 국내의 두곡이궁터를 찾아냈고, 두곡동쪽 벌판에 조성했다는 유리왕릉 조성지를 찾아냈는데, 그 위치는 북경 연경현에 있는 용경협 입구와 그 동쪽 벌판이었다.[위 그림 참조]  

아직 발굴을 해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거의 확실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앞으로 우리가  직접 발굴, 확인할 수 있는 여건이 될 때까지 비공개로 해두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두곡이궁터와 유리왕릉 조성 위치 공개여부에 대하여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우리의 대륙 역사강역을 하루라도 빨리 확인하기 위해 위치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대륙 역사강역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앞으로 대수촌원에 조성된 고구려 대무신왕릉의 위치도 공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