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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북연(北燕) 풍홍(馮弘)이 죽어 묻힌 고구려 북풍(北豐)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4. 2. 3. 09:23

윤여동설 북연(北燕) 풍홍(馮弘)이 죽어 묻힌 고구려 북풍(北豐)의 위치를 찾았다 최초공개

 

 

 

[북풍 부근의 산세]

 

  북연(北燕)의 풍홍(馮弘)438년에 고구려로 망명해 오자 당시 고구려의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平郭)이라는 곳에 배치했다가 얼마 후 다시 북풍(北豐)으로 옮겨 배치했는데, 풍홍이 유송(유유의 송나라)으로의 망명을 다시 추진하자 장수들로 하여금 풍홍과 그 일족 10여 명을 모두 죽여버리도록 조치한다.

  따라서 풍홍이 죽은 곳이 고구려의 북풍(北豐)이었으므로, 분명히 그곳에 묻혔을 것인데, 지금까지 북풍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따라서 아직까지도 북연 풍홍(馮弘)의 능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고구려에서 풍홍의 능을 격식에 맞게 대규모로 조성해 주었는지, 아니면 그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 평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북풍 어디엔가 묻어주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북풍(北豐)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호태왕(광개토왕, 영락태왕) 비문을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인 395년에 고구려 서북쪽에 위치한 비려가 고구려 백성들을 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비려(裨麗, 稗麗라고도 한다)를 정벌하는데, 이때 영락태왕은 비려(또는 패려)의 염수(鹽水)까지 진격하여 3개 부락 6-700영을 격파하고 셀수 없을 만큼의 소, , 양떼를 노획한 후, 양평(襄平)을 경유하여 역성, 북풍(北豐)을 지나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하면서 개선했다[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五備遊觀土境田獵而還]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문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양평(襄平)과 북풍(北豐)이 언급되는 것이다.

  양평(襄平)은 전한서 요동군(遼東郡) 조에, 요동군의 수현(首縣)으로서 왕망이 창평(昌平)으로 고쳤다는 곳이고,[前漢書 遼東郡 秦置屬幽州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 襄平 有牧師官 莽曰昌平, 新昌, 無慮 西部都尉治[師古曰 卽所謂醫巫閭],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장열), , 候城 中部都尉治, 遼隊 莽曰順睦,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莽曰遼陰, 險瀆(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浿音普大反), 居就 室僞山 室僞水所出 北至襄平入梁(), 高縣, 安市, 武次 東部都尉治 莽曰桓次, 平郭 有鐵官鹽官, 西安平 莽曰北安平, 文 莽曰 文亭,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應劭曰 汗水出塞外 西南入海),沓氏]

  북풍(北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수왕이 북연의 풍홍을 배치했다가 죽여버린 장소로서 지금까지 그 위치가 어디인지 불분명했었지만, 호태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평양동황성)이 지금 피서산장이 있는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로 밝혀졌고, 비려(또는 패려)의 염수(鹽水)는 내몽골 오란찰포시 북쪽 찰합이우익후기에 있는 염호(鹽湖)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호태왕(영락태왕, 광개토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도읍인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를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향하여 난하를 타고 올라가 내몽골 찰합이우익후기 일원을 정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전리품으로 챙겨 군사들과 함께 여유롭게 나라의 서쪽 변경을 구경하고, 사냥도 하면서 개선길에 오른다.

  이때 호태왕은 비려 (또는 패려)즉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시 북쪽 찰합이우익후기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향하여 고구려의 서쪽 변경이었을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대경문장성을 넘고, 선화고성을 지나, 관청수고를 건너, 거용관을 넘고, 북경 창평을 지나, 밀운수고를 건너 고북구를 통과한 후 조하를 타고 올라가다가 천교진을 지나 동북쪽 석인구향 방향 지류로 방향을 바꾸어 전진하여 봉산진을 거쳐 난하를 따라 내려와 도읍인 하북성 승덕시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장수왕이 북연의 풍홍을 배치했던 평곽(平郭縣, 평곽성, 후일의 건안성)은 지금의 밀운수고 동북쪽 하북성 승덕시 난평현(灤平縣) 부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으므로, 북풍(北豐)은 난평현의 북쪽 하북성 승덕시 풍녕현(풍녕만족자치현) 봉산진(鳳山鎭)으로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인데, 북풍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봉산진은 난하 지류인 흥주하(興州河)의 최상류 지역이고, 산맥으로 빙둘러싸인 분지지형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 그리하여 장수왕은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마치 아직도 황제인양 거들먹거리며,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일삼는 풍홍을 요동을 오가는 교통의 요충인 평곽에서 이곳 북풍으로 이동 배치함으로써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북풍(北豐) 즉 지금의 봉산진(鳳山鎭)에서 죽은 북연 풍홍은 그 부근에 묻혔을 것이므로 그의 능은 바로 이곳 봉산진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아직 아무도 그 위치를 찾은 사람이 없다.

  과연 누가 하북성 승덕시 풍녕현(풍녕만족자치현) 봉산진 부근에서 북연 풍홍의 능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봉산진 부근에는 그 지명처럼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명당지지가 아주 많이 눈에 띄고, 분지도 비교적 넓게 형성되어 있는데, 어쩌면 북연 풍홍도 그 중의 어느 명당지에 묻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죽임을 당하기는 했지만 죽어 묻힌 지 1600년이 다 되도록 지금까지 편안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능이 명당지에 조성된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