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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태대대로(太大對盧) 연개소문(淵蓋蘇文墓)은 죽어 어디에 묻혔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24. 5. 4. 19:28

윤여동설 -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에 조성된 고구려 연개소문묘(淵蓋蘇文墓) 찾기 - 최초공개

 

 

 

[발해 북쪽에 고구려,백제,신라를 표시한 거란국지의 거란지리지도]

 

 

[: 중국 경극 속 고구려 연개소문 모습]

 

[: 막리지비도대전(莫利支飛刀對箭) : 당태종, 연개소문, 설인귀]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를 보면,

책성에 태조무열제의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변 위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烏蘇里江)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 중간 기슭에 동천제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柵城有太祖武烈帝紀功碑

東鴨綠之皇城有廣開土境大勳蹟碑

安州淸川江岸上有乙支文德石像

烏蘇里江外有淵蓋蘇文頌德

平壤牡丹峰中麓有東川帝朝天石

朔州巨門山西麓有乙巴素墓

雲山之九峰山有淵蓋蘇文墓)”라고 기록되어 있어,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에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묘()가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으로 밝혀졌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이며,

동부여(東扶餘)는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正藍旗) 일원을 말하는 것이므로,

연개소문의 묘는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구당서 고구려전 정관5(A.D.631) 조를 보면, "건무(고구려 영류왕의 이름)는 그 나라가 침입당 할 것을 두려워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쪽 부여성(필자주 : 동부여를 말한다)으로부터 서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1천여리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류왕 25(A.D.642) 조를 보면, “왕이 서부대인 개소문(연개소문)에게 명령하여 장성(長城, 필자주 : 고구려 천리장성을 말한다)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 북쪽이 아닌 발해 북쪽 내몽골 정람기 부근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장성(長城)을 쌓아 내려와 지금의 오란찰포시(烏蘭察布市) 부근까지 이르렀을 것인데, 이는 고구려의 서북쪽에 위치했던 거란(契丹)의 침공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고구려천리장성(高句麗千里長城) 축성을 완공시킨 사람이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아마 이때 연개소문은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성과 관련하여 당시 도읍이었던 평양성(平壤城)과 천리장성 축성 현장을 수없이 오갔을 것인데, 그 길목에 위치한 곳이 바로 운산(雲山)이었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오가며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 산세를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반달[半月] 형상으로 생긴 구봉산(九峰山)이 풍수지리상 매우 좋아 보였던지, 서기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후 바로 그곳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 최고의 권력자였던 태대대로(太大對盧) 연개소문 본인이 자식들과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거든 명당인 그곳 구봉산에 묻어달라 유언했을 것인데, 지금 우리는 발해 북쪽 우리의 대륙 역사 강역을 잃어버림으로써 운산(雲山)의 위치도 함께 잃어버려 지금까지 연개소문의 묘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평안북도 운산(雲山)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묘가 조성된 운산이 아니다. 고려말에 이성계가 발해 북쪽 대륙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후 그곳을 떠나 지금의 한반도 서울로 도읍을 옮기고, 대륙 지명들의 이름과 연혁을 모두 한반도로 교치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운당필기 제2권 풍홍총(馮弘冢) 조에, 성용연(成龍淵,성대중)은 운산군수(雲山郡守)를 지냈는데, 그가 해 준 말이다. “ '고을에 큰 무덤이 있는데 황제총(皇帝冢)이라고 하더라. 돌을 쌓아 만든 것인데, 한쪽 모퉁이가 무너져 내렸기에 들여다 보았더니 움푹하게 생겼는데 속이 텅 비어 있더군. 사람들은 황제가 곧 위만(衛滿)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풍홍(馮弘)이라고도 하더군.'

살펴보건대 위만은 황제를 칭한 적이 없고, 풍홍은 고구려에 맞아들여져 평곽(平郭)에서 살다가 얼마 후 북풍(北豐)으로 옮겨졌고, 장수왕이 장군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북풍에 있는 풍홍을 죽였다. 시호는 소성(昭成)이다. 운산이 바로 고구려의 북풍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말기 사람인 성대중 선생이 유득공 선생에게 말해 주었다는 운산(雲山)은 분명 한반도 평안북도의 운산을 말하는 것일텐데,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오래되고 큰 고총을 위만총 또는 풍홍총이라고 한다지만, 유득공 선생 자신의 견해로는 그곳이 북풍(北豐)일 것이므로 그렇다면 위만의 무덤이 아니라 풍홍총일 것이다라는 글인데, 역사에 밝았던 고운당 유득공 선생도 어쩔 수 없는 한반도 조선 선비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묘가 조성되었다는 진짜 발해 북쪽 고구려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이며, 그곳에는 지금도 구봉산(九峰山)이라는 산이 있을까?

 

[: 옛 운산(雲山)이었을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풍녕현(河北省 承德市 豐寧縣)]

 

[: 옛 운산의 구봉산(九峰山)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풍녕 구룡산공원(九龍山公園)]

 

[: 고구려 태대대로(太大對盧) 연개소문묘(淵蓋蘇文墓) 조성지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 추정지]

 

필자가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묘가 조성되었다는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풍녕현(豐寧縣)의 구룡산공원(九龍山公園)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옛날에는 구봉산(九峰山)으로 불리우던 산이 언젠가 구룡산(九龍山)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하북성 풍녕현 구룡산공원에서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묘를 찾아야 할 것인데, 추정좌표는 동경1163824초 북위411135초이다.

당시 고구려의 왕보다도 더 큰 권력을 휘둘렀던 고구려의 태대대로(太大對盧)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묘가 부디 훼손이나 도굴없이 지금까지 온전했기를 기원해 본다.

그곳이 우리의 대륙 역사 강역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참고]

연남생 기록으로 본 환단고기, 위서(僞書)일까?

 

조선인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고 조작된 일제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한 강단사학계는 그들의 역사이론과 전혀 다른 내용의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고 말하고 있다. 이유는 20세기 초에 나온 책인지라 사료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은데다가 역사서로 보기에는 논리가 약하고 비합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환단고기추종자들을 사이비(似而非) 역사학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반면 재야사학계에서는환단고기를 민족의 성서(聖書)로 신봉하고 있다. 과연 어느 사학이 사이비인지 연남생의 기록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책인태백일사고구리국 본기에는 연남생의 아버지인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해

조대기(朝代記)에서 말하길,

개소문은 일명 개금(盖金)이라고 한다.

성은 연씨이고,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太祚)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游)라 하고,

증조부는 광()이었는데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弘武) 14(603) 510일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삼국사기를 찾아보니 개소문(혹은 개금)은 성이 연씨다. 그는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했다. 부친 동부(혹은 서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해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상한 기록뿐이었다.

그런데 1921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된 천남생묘지명

성씨는 천()이며 이름은 남생(男生)이고 자는 원덕(元德)으로 요동군 평양성 출신이다. 증조부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太祚)로 다 막리지를 역임했고

아버지 개금(개소문)은 태대대로였는데, 조부와 부친이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했다고 새겨져 있어 위태백일사의 조상명과 정확히 일치했다.

또한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의 묘지명에는

군의 이름은 헌성이며 자도 헌성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 사람이다. (중략)

증조부 대조(大祚)는 본국에서 막리지에 임용되었으며, 병권을 장악해 기세가 삼한을 제압하고 명성은 5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조부인 개금(개소문)은 본국에서 태대대로에 임용되고 병권을 장악했으며, 아버지가 이어주고 아들이 계승해 권력을 잡고 총애 받음이 두드러졌다.

아버지 남생(男生)은 본국에서 태대막리지에 임용되었으며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귀속하니 당나라는 특진에 임명하고 사지절요동대도독(使持節遼東大都督)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을 겸하게 했다가 이내 장내공봉(仗內供奉상주국(上柱國변국공(卞國公)에 임명하고 병주(幷州익주(益州) 2() 대도독에 추증하니 시호는 양()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렇듯태백일사에 기록된 조상들의 이름이 천남생묘지명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책을 위서 운운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634(영류왕 17) 연개소문의 장자로 태어난 남생은 32세에 부친의 후광으로 태대막리지가 되었다가 이듬해 정변을 일으킨 남건·남산 두 동생들에게 쫓겨 갈 곳이 없어지자 이민족의 나라인 당나라로 투항해버렸다.

당 고조 이연(李淵)을 피휘(避諱)하기 위해 연()씨에서 의미가 비슷한 천()씨로 바꿔야했다.

66835세에 당나라 군대의 선봉에 서서 천하의 대제국인 조국 고구리를 멸망시켰다.

고구리군의 작전과 산천의 지형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 데다가 그와 내통한 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쟁 후 식읍 3천호와 묘비명에 언급된 벼슬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6791월에 병을 얻어 46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 고작 10여년을 더 살려고 조국을 멸망시키는 민족반역행위를 했단 말인가!

당나라 조정에서는 사지절대도독, (((()4주제군사(四州諸軍事)와 병주자사(幷州刺史)를 추증했으며, 비단 700단과 미속(米粟) 700석을 주었고 장례물품은 모두 관급으로 했으며, 군악대를 묘소까지 보내주었다. 3일 동안 조정의 일을 보지 않았고 발인 날 5품 이상 관리는 그 집으로 가도록 해 애송(哀送)의 성대함이 고금에 다시 없었다고 한다.

만약 두 아우와의 권력싸움에서 패한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조용히 산 속으로 잠적했더라면 아마도 고구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생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당나라의 힘을 빌어 빼앗긴 고구려에서의 자기 위치를 되찾으려했던 연남생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다.

배달국과 조선과 북부여의 4천년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대제국 고구리의 멸망이었기에 우리 민족에게는 그 슬픔과 아쉬움이 더 컸던 것이고 그러기에 그런 고구리를 멸망시킨 남생의 죄악 역시 누구보다 더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우리 역사상 가장 악질 매국노인 동시에 민족반역자로 치는 것이기도 하다.[성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