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해동통보(海東通寶)는 발해 북쪽에 위치했던 고려의 엽전이고, 동국통보(東國通寶)는 무광왕(武廣王)이 세운 반도백제(半島百濟) 즉 동국(東國)의 엽전이었을 가능성 – 최초주장
“동국(東國)”은 무광왕(武廣王)이 4세기 중반 한반도에 세운 백제(반도백제)의 별칭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도백제는 건국된 지 100여년 후인 5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미 강국이 되어 있었는데, 이 시기에 발해 북쪽에 위치했던 대륙백제(온조백제)는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 때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하게 되고, 손자인 동성왕(東城王, 필자주 : 동성왕이 동국에서 왔음을 표시한 시호는 아닐까?)을 대륙으로 보내 왕위에 오르게 한다.[필자주 : 동성왕이 모도왕의 손자였음은 중국 사서들에 동성왕에게 작위를 주면서 그 할아버지 모도왕의 작위를 계승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동성왕 때 대륙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대승함으로써 산동성 지역(청주와 동청주)을 전리품으로 빼앗아 차지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발해 북쪽 대륙백제와 한반도의 반도백제는 청주와 동청주를 중간기착지로 하여 활발한 교역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고, 중국과의 교역도 넓힐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 요동반도에 위치했던 고대의 왜국과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반도백제도 추세에 따라 어느 시기에 엽전을 만들어 화폐로서 통용시켰을 것인데, 반도백제에서는 동쪽에 위치한 나라라 하여 엽전의 명칭을 동국통보(東國通寶)라 하였을 것이다.
☆ 백제가 지원 4년인 1267년도까지 원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원사에 남아 있어 이때까지 백제가 어디엔가 존속하고 있었을 것인데, 필자는 이 백제가 바로 반도백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지원4년(A.D.1267)봄정월 백제가 그 신하 양호(粱浩)를 보내 내조하였으므로 비단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至元四年春正月乙巳 百濟遣其臣梁浩來朝 賜以錦繡有差)]
그런데 학자라는 사람들은 동국통보의 주조, 유통 기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려사의 엽전 주조 기록을 보고는 동국통보도 고려의 엽전으로서 고려 중기쯤 주조되었을 것이라 억지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국통보가 고려의 엽전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 동국통보가 고려가 아니라 한반도의 반도백제 즉 동국에서 만들어 유통되었던 엽전이었기 때문에 그 명칭도 동국통보(東國通寶)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해동통보(海東通寶) : 발해 북쪽 해동(海東)에 위치했던 고려(高麗)에서 숙종 때 만들어져 1102년부터 통용된 엽전]
[동국통보(東國通寶) : 제작 시기에 관한 기록이 없음. 이 동국통보나 동국중보가 발해 북쪽 고려(高麗)가 아니라 한반도에 위치했던 동국(東國) 즉 한반도의 반도백제[필자주 : 무광왕이 4세기 중엽에 한반도에 세운 반도백제를 말한다]에서 만들어져 통용되던 엽전이었을 가능성이 많음]
[동국통보에 관한 주조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그냥 고려시대 엽전인 해동통보, 삼한통보 등과 함께 그때쯤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학자들의 역사 해석은 확실한 것이 없이 항상 요 모양 요꼴이다.]
[왕망 때의 화폐인 화천인데 한반도에서도 많이 출토된다. 왕망의 신나라가 후한 광무제에 의해 멸망하고 후한이 서자 흉노족이었던 김성(한반도 흉노족왕국의 건국시조였던 태조 성한왕) 일행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올 때 가져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