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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31대 진짜 신문왕릉(神文王陵) 조성지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4. 8. 17. 21:22

윤여동설 신라 31대 진짜 신문왕릉(神文王陵) 조성지를 찾았다 최초주장

 

 

 

[한반도 경주의 가짜 신라 신문왕릉. 한반도 경주는 신라의 서라벌이 아니라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 태조 성한왕(星漢王) 김성(金星)이 세운 흉노족왕국의 도읍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경주의 대형고분들은 흉노족왕국의 왕릉들이지 신라 왕릉이 아니다.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한반도 경주에 있다고 하는 신라 신문왕릉(神文王陵)은 가짜이다. 왜냐하면 신라 신문왕은 한반도 경주에서 살다 죽은 왕이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신라의 서라벌(徐羅伐, 필자주 : 遼寧省 錦州市)에서 살다 죽어 그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은 죽어 지금의 어디에 묻혔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 신문왕의 왕릉 조성지에 대하여,

재위 12(A.D.692) 가을7월 왕이 훙() 하였다. 시호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의 건국 시조인 혁거세거서간의 능 조성지에 대하여,

재위 61(A.D.4) 3월 거서간이 승하(昇遐) 하였다. 사릉(蛇陵)에 장사 지내니 사릉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대 남해차차웅의 능에 대하여,

재위 21(A.D.24) 왕이 훙() 하였다.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3대 유리이사금의 능에 대하여,

재위 34(A.D.57) 겨울10월 왕이 훙() 하였다.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5대 파사이사금의 능에 대하여,

재위 33(A.D.112) 겨울10월 왕이 훙() 하였다.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초기 박씨왕들은 모두 이 사릉원(蛇陵園)에 묻혔다. 사릉원은 신라 박씨왕들의 죽어 묻히는 왕릉원이었다.

 

  그리고 신라 27대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조성지에 대하여는,

재위 16(A.D.647) 8월 왕이 훙() 하였다.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를 보면,

옛날 진한(辰韓) 땅에는 여섯 촌()이 있었다.

1왈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 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유리왕) 9년에 부()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 했다. 고려 태조 천복5년 경자(A.D.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를 보면,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산천 조를 보면,

낭산(狼山) : 경주부 동쪽 9리에 있는 진산이다.”

동천(東川) : 일운 북천(北川), 일운 알천(閼川)이라고도 하는데, 경주부 동쪽 5리에 있다. 추령(楸嶺)에서 나와 굴연(堀淵)으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능묘(陵墓) 조를 보면,

혁거세릉(赫居世陵) : 담엄사(曇嚴寺) []에 있다.”

선덕왕릉(善德王陵, 선덕여왕릉) : 낭산남령(狼山南嶺)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책 고적(古跡) 조를 보면,

담암사(曇巖寺) : 옛터가 사릉(蛇陵) 남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경주부 동쪽 5리에 위치한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남쪽에 사릉원(蛇陵園)이 위치하고 있었고,

  사릉원의 남쪽에 담암사(담엄사)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했으므로,

  혁거세거서간을 비롯한 신라 초기 박씨왕들의 능은 서라벌 동쪽 5리쯤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경주부 동쪽 9리 쯤에 낭산(狼山)이 위치했었고,

  그 낭산의 남쪽 줄기에는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이 조성되었고,

  낭산의 동쪽에는 신문왕릉(神文王陵)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혁거세거서간의 탄생지 양산나정(楊山蘿井)은 사릉원(蛇陵園)의 동남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 조에 양산나정은 경주부 남쪽 7리에 있다라는 기록은 양산나정은 경주부 동쪽 7리에 있다의 오기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알천(알천양산촌)이 서라벌 동쪽 5리쯤에 위치했었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6부의 촌장들이 바로 그 알천언덕(양산)에 올라 양산 남쪽에 위치한 나정(蘿井)의 상황을 맨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신라 서라벌의 동쪽 5리쯤에서 사릉원(蛇陵園)을 찾아야 하고,

  서라벌의 동쪽 7리쯤에서 양산나정(楊山蘿井)을 찾아야 하며,

  서라벌의 동쪽 9리쯤에 낭산(狼山)이 위치했는데,

  그 낭산의 서쪽 양산(楊山)에서 사릉원(蛇陵園)과 나정(蘿井)을 찾아야 하고,

  낭산 남쪽 줄기에서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을 찾아야 하며,

  낭산 동쪽에서 신문왕릉(神文王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은 한반도 경주(慶州)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가서 찾아보면,

  신라의 서라벌(徐羅伐)을 찾을 수 있고,

  신라 서라벌 동쪽에 위치한 낭산(狼山)의 서쪽 방향에서 혁거세거서간의 능이 조성된 사릉원(蛇陵園)과 나정(蘿井)을 찾을 수 있고,

  낭산의 남쪽에서 27대 선덕여왕릉을 찾을 수 있으며,

  낭산의 동쪽에서 31대 신문왕릉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가서 낭산(狼山)을 찾았고, 신라왕릉들을 찾아낸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곳에서 신라 왕릉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는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徐羅伐)로서 우리 신라 역사를 밝힐 수 있는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진짜 신라의 역사 강역을 찾고 싶다면,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위 그림을 보시라.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우리 신라(新羅)의 천년 역사가 묻혀 있는 매우 중요한 곳임을 우리 역사학자들이 하루 빨리 인식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