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전한낙랑군(前漢樂浪郡)과 후한낙랑군(後漢樂浪郡)그리고 서진낙랑군(西晉樂浪郡)의 위치는 각각 다른 곳이었다 – 최초주장
[위 : 옛 갈석산(碣石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풍경]
전한(前漢) 무제 때인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설치했던 원래의 한사군(漢四郡)은,
낙랑군(樂浪郡, 치소는 고조선(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진번군(眞番郡, 치소는 우수주였던 지금의 요녕성 능원),
임둔군(臨屯郡, 치소는 명주였던 지금의 내몽골 통요의 고륜기),
현토군(玄菟郡, 치소는 함주였던 지금의 내몽골 적봉의 옹우특기)이었다.
그런데 진번군과 임둔군은 설치된 지 26년 후인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고[필자주 : 진번군은 맥국이 되고, 임둔군은 동예가 되었다],
기원전 75년에 이르러서는 옥저 땅에 설치했던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설치하게 된다.[필자주 : 현토군이 옮겨가자 그 땅은 다시 북옥저,남옥저,동옥저로 거듭난다]
그리고 전한낙랑군(前漢樂浪郡)의 치소는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 위만조선의 조선현(朝鮮縣)이었던 지금의 발해 북쪽 하북성 승덕시에 설치했었는데, 그 후 전한→ 신(新)→ 후한 교체기에 잠깐동안 최리의 낙랑국(樂浪國)이 되었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이 서기 37년에 이르러 최리의 낙랑국(전한낙랑군)을 쳐서 빼앗아 버리게 된다.
그러자 7년 후인 서기 44년 가을에 이르러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옛 전한낙랑군 땅 전부를 탈환하려 시도했으나, 고구려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전부를 탈환하지는 못하고 옛 낙랑남부도위에 속했던 7개현 만을 탈환하고는 그곳 살수(薩水) 이남 지역에 다시 낙랑군을 부활시키게 되고, 치소를 지금의 북경 동북쪽 무령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하북성 흥륭현(興隆縣) 부근에 두게 되는데, 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後漢樂浪郡)이라 부른다.
그런데 서기 313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이 이 살수이남 후한낙랑군(後漢樂浪郡)을 쳐서 빼앗아 버리자, 당시 서진(西晉)에서는 이 후한낙랑군을 갈석산(碣石山,현 하북성 보정시 낭아산) 부근으로 교치(僑置)시켜 다시 설치한다.
그리고는 태강지리지에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라는 기록을 삽입해 놓게 되는데, 필자는 서진이 교치한 이 낙랑군을 서진낙랑군(西晉樂浪郡)이라 부른다.
그런데 역사연구자들이 서진(西晉)에서 낙랑(樂浪)을 갈석산(碣石山) 부근으로 교치(僑置)시켰고, 그리하여 서진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진장성(秦長城)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는 내용이 서진 때에 삽입 기록되었음을 알지 못하고는,
전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의 원래 위치도 갈석산 부근이었다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가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전한(前漢) 무제가 설치했던 최초의 전한낙랑군,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살수(薩水) 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빼앗아 설치했던 후한낙랑군 그리고 서진(西晉)에서 갈석산(碣石山) 부근으로 위치를 옮겨 다시 설치했던 서진낙랑군의 위치가 각각 달랐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낙랑군(樂浪郡)의 위치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고, 헷갈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전한낙랑군(前漢樂浪郡), 후한낙랑군(後漢樂浪郡), 서진낙랑군(西晉樂浪郡)의 위치가 각각 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