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발해5경 중 동경책성부(동경용원부)와 니하(泥河)의 위치(확정) – 최초주장
발해국(渤海國)은 5경(五京)을 두었다고 전해져 왔다.
상경용천부
(숙신고지)
서경압록부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책성부)
(고구려고지) (숙신고지) (예맥고지)
남경남해부
(옥저고지)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 숙신의 옛 땅(肅愼故地)으로 상경(上京)을 삼고 용천부(龍泉府)라 하니,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3주를 다스리고,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 그 남쪽을 중경(中京)으로 삼고 현덕부(顯德府)라 하니,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6주를 다스리며,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 예맥(동예와 맥국)의 옛 땅(濊貊故地)으로 동경(東京)을 삼고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고 하였는데,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 4주를 다스리고,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 옥저의 옛 땅(沃沮故地)으로 남경(南京)을 삼고 남해부(南海府)라 하니,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 3주를 다스리고,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 : 고구려 옛 땅(高句麗故地)으로 서경(西京)을 삼고 압록부(鴨淥府)라 하니,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4주를 다스린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를 알 수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 발해국 5경의 위치에 대하여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고, 또
“용원(東京龍原府, 동경책성부)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도(日本道, 일본 가는 길)이고,
남해(南京南海府)는 신라도(新羅道, 신라 가는 길)이다.
압록(西京鴨淥府)은 조공도(朝貢道, 중국에 조공 가는 길)이고,
장령(長嶺府)은 영주도(營州道, 영주 가는 길)이며,
부여[東扶餘府]는 거란도(契丹道, 거란 가는 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발해국 5경의 위치를 명확하게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록도 잘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필자가 많은 시간을 들여 그 발해 5경의 진짜 위치를 찾아냈는데,
발해국의 첫 도읍이었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 지금의 발해 북쪽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 내몽골 적봉시 파림우기(巴林右旗)였고,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는 적봉시 파림좌기(巴林左旗)였으며,
[필자주 : 이곳 파림좌기에 발해국 상경성이었을 고성터가 현존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 성터를 거란(요) 상경성터라고 하고 있으나 말도 안되는 순 엉터리이다.]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내몽골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또는 적봉시(赤峰市) 부근이었고,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는 북경시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이었다.
그리고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는 내몽골 통요시 나만기(奈曼旗)로 비정되는데,
잠깐동안이었지만 발해국의 도읍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한 이 발해의 동경용원부(동경책성부)에 대하여 검토해 보자.
신당서 발해 전을 보면,
발해의 건국지에 대하여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다. 그 땅이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니하(泥河)를 국경으로 삼았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거란까지이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구려의 패잔병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만세통천(A.D.696)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와의 사이에 성벽을 쌓아 수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와 발해의 국경이 바로 이 니하(泥河)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니하는 앞선 고구려 때에도 신라와의 국경으로서 두 나라는 이곳에서 치열하게 다투엇섰다.
그런데 신당서에는, 발해국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대하여, “예맥(동예와 맥국)의 옛 땅(濊貊故地)으로 동경(東京)을 삼고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기록 속에서 우리는 발해국의 동경용원부를 동경책성부라고도 불렀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4년(A.D.56) 조를 보면, “가을7월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만들고, 동으로는 창해(滄海)까지,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확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태조대왕 46년(A.D.98)조에는, “봄3월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순행하다가 책성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 흰사슴을 잡았다. 다시 책성으로 돌아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면서 책성관리들에게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고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겨 놓고 돌아왔다. 겨울10월 왕이 책성으로부터 돌아왔다.”라고 책성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 태조대왕은 책성을 순행하고 서쪽의 동옥저로 가려다가 중간에서 흰사슴을 잡자 책성으로 되돌아가 잔치를 베풀고 책성 관리들에게 포상하고 바위에 그들의 공적을 새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신당서 발해전에는 동경책성부(동경용원부)의 설치장소에 대하여 “예맥의 옛 땅을 동경으로 삼았다”고 했고, 고구려는 이미 3대 대무신왕 때인 서기 30년에 낙랑동부도위를 쳐서 없앰으로써 예맥(濊貊) 땅의 일부를 차지했었기 때문에 책성(柵城)은 동옥저(東沃沮)에서 동쪽 가까이에 위치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만왕부가 옛 발해국 동경책성부의 흔적은 아닐지.....]
필자가 밝혀본 바에 따르면,
동옥저(東沃沮)는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하가점 일원을 말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책성(柵城) 역시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을 것인데,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동쪽 통요시 나만기(奈曼旗)에 비정해 볼 수 있다.
이곳은 주변 지형이 높은 산이나 높은 산능선이 없는 평원지역이므로 적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목책(木柵)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아주 먼 옛날부터 목책이 있었기 때문인지 지명 자체가 “柵城(책성)”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역할을 했던 니하(泥河)가 세월이 흐른 후인 발해국과 신라 때에도 여전히 국경 역할을 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니하는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北標市)에 있는 망우하(牤牛河)로 밝혀졌고,
하슬라(溟州)는 내몽골 통요시 고륜기(庫倫旗),
실직(三陟)은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신라의 도읍 서라벌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고구려의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백제의 웅진성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으로 밝혀졌다.
대개 지금의 발해 북쪽, 북경 동쪽 대륙이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중심 강역이었다.
그렇다면 발해의 동경책성부(東京柵城府)는 당시 신라와의 국경이었던 니하(泥河, 현재 북표시의 망우하)의 서쪽에 위치했을 것인데, 지금의 나만기(奈曼旗)가 이에 해당하는 곳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발해의 동경책성부는 또 동남쪽에 위치한 일본으로 가는 길이라고도 설명되어 있는데,
고대의 왜국(일본)은 발해 동쪽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로 밝혀졌으므로 기록과 지형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발해의 동경책성부(동경용원부)는 지금의 내몽골 통요시의 나만기(奈曼旗, 나이만기)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完.
[참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6대 지마이사금 14년(A.D.125)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으로 대부대로 몰려와서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더니 가을 7월에 또 대령책(大嶺柵)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넘었다.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5명의 장군을 보내 도우매 적병이 소문을 듣고 물러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19대 눌지마립간 34년(A.D.450) 가을7월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 벌판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何瑟羅)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어 그를 엄습하여 죽였다.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내가 대왕과 함께 관계를 닦아 매우 기뻐하던 차에 이제 군사를 내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이니 이 무슨 도리인가?”하고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우리(신라)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니 그만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0대 장수왕 28년(A.D.450) 신라 사람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다. 왕이 화를 내어 군사를 출동시켜 치려하였더니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그만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0대 자비마립간 11년(A.D.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56년(A.D.468) 봄2월에 왕이 말갈의 군사 1만으로서 신라의 실직주성을 쳐서 빼앗았다.][필자주 : 잠깐동안 고구려가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곧 신라가 도로 탈환했을 것이다]
가을9월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나이 15세 이상 되는 자를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니하(泥河)의 다른 이름은 니천(泥川)이다]
☆ 니하(泥河)는 하슬라(후일의 명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강임을 알 수 있고, 실직은 후일의 삼척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1대 소지마립간 3년(A.D.481)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와서 호명 등 7개성을 빼앗고, 또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가는 것을 추격하여 니하(泥河)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 니하(泥河)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서, 동쪽은 신라 강역, 서쪽은 고구려 강역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8년(A.D.496) 가을7월 고구려가 와서 우산성(牛山城)을 치므로 장군 실죽이 나가 니하(泥河)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1대 문자왕 5년(A.D.496) 가을7월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쳤더니 신라군사가 니하(泥河) 가에 나와서 반격하므로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9년(A.D.497)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6년(A.D.497) 가을8월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쳐서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