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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천년의 수수께끼 “연경(燕京)”의 위치를 찾았다(확정) – 최초주장

윤여동 2024. 11. 9. 07:09

윤여동설 천년의 수수께끼 연경(燕京)”의 위치를 찾았다(확정) 최초주장

 

 

 

  “한서지(漢書志)에 이르기를,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 떨어져 있으며, 속현으로서 무려(無慮)가 있다고 했는데 곧 주례(周禮)의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서 대요(大遼) 때에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옛날 대요(大遼 : 요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나라 임금이 연경(燕京 : 요 남경석진부)에 있었는데, 우리(고려)의 입조 사신들이 () 동경(東京遼陽府)을 통과하고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만에 의주(醫州)에 당도하여 연경(燕京), 계주(薊州)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한서지의 기록이 옳음을 알 수 있다[漢書志云 遼東郡 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鎮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윗글은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편에 실려 있는 내용인데, 고려 개경에서 요(거란) 연경(남경석진부)까지 가는 노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위 그림과 비교하며 읽어보면, 필자가 비정한 위치와 기록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고대의 요동(遼東)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있게 되어, 드디어 역사연구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요, 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직 요원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이 바로 고대의 요동군(遼東郡)이었다.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다는 그 요동군 말이다.    

  따라서 요동군((遼東郡) 땅에 설치했던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여진)나라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지금의 북경을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 북쪽 요녕성 요양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 발해 북쪽, 북경 동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이었다. 관성현 부근의 특이지형이 그를 확실하게 확인시켜 준다.

  우리의 고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던 대륙역사이지 한반도의 반도역사가 아니었다.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도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고,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도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려까지도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의 왜국(일본)도 지금의 발해 동쪽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 사서들에 요동(遼東)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위치했다고 기록했던 것이고,

  고대의 왜국(倭國)이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위치하고 있던 신라(新羅)를 자주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의 진실이다.

  지금까지 여러분들도 속았고, 나도 속았던 것이다.

 

[옛 의무려산이었던 지금의 상방산]

 

  원래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있는 의무려산이 아니라, 지금 북경 서남쪽 방산의 상방산(上方山)이 진짜 의무려산(醫巫閭山)이었다.

  지금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동북쪽에 있는 북진과 의무려산은 명, 청대에 위치가 옮겨진 가짜일 뿐이다.[필자주 : 지금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북진과 의무려산은 신라 동쪽에 위치했던 장인국(長人國)이었다]

 

 

  거란지리지도 상의 동경(東京)은 지금의 북경(고대의 요동)을 말하는 것이고, 그 서남쪽에 그려 놓은 연경(燕京)은 하북성 탁주(涿州) 부근의 거마하(拒馬河) 강변에 위치했던 연경을 표시한 것이다.

 

 

 

 

  드디어 천년의 수수께끼 연경(燕京)을 찾은 것이다.

  연경(燕京)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보정시 탁주시(涿州市) 서북쪽 거마하(拒馬河) 강변에 위치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고대의 연경((燕京)은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북경시 방산구와 하북성 보정시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백옥생산지 대석와진(大石窩鎭)과 하북성 보정시 탁주시의 백척간진(百尺竿鎭) 부근이었다.

  그리하여 요(거란)나라에서는 그곳을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라고 강나루와 관련 있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이고,

 

요사 남경석진부 석진현 조에는 ()이 별자리로 석목(析木)의 진()에 해당하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析津縣. 本晉薊縣 改薊北縣 開泰元年更今名 以燕分野旅寅為析木之津 故名 户二萬)”고 하는 기록도 있다

 

  금(여진)나라에서는 이곳을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라 했고, 원(몽골)나라에서는 대도(大都)라 했던 것이다.

  원(元)나라의 대도는 지금의 북경이 아니라 북경 서남쪽 탁주시(涿州市) 부근의 거마하(拒馬河)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북경은 원래 요동군(遼東郡)으로서 요(거란)나라의 동경요양부였고, 금나라의 동경요양부였다.

  지금의 북경은 명나라 또는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국가의 전체 도읍으로서의 역할을 한 도시일 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