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려의 국제무역항 진짜 벽란도(碧瀾渡,예성항)는 발해 북쪽 난하 중류 청하구(淸河口) – 최초주장
[고려의 개경(開京)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
[지금의 발해 북쪽 난하 중류에 진짜 고려 때의 국제무역항 벽란도(예성항)가 위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 청하구(淸河口). 좌표 : 동경118도15분01초 북위40도33분48초]
[지금의 발해 북쪽 난하 중류 험준한 산들로 둘러 쌓인 고려 벽란도(예성항) 주변의 지형]
[고려도경을 지은 옛날 송나라의 서긍도 바로 이 벽란도에서 배에서 내려 벽란정에 들렀다가 도읍인 개경을 향하여 갔다 왔을 것이다]
고려 개경(開京) 서쪽 36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고려의 해외 교역의 중심 역할을 했던 국제항구 벽란도(碧瀾渡, 필자주 : 옛 이름은 예성항이었다)는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찾고보니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이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이었고, 벽란도(碧瀾渡)는 관성만족자치현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난하(灤河)로 흘러들어가는 폭하구(瀑河口) 바로 북쪽 난하(灤河)와 청하(淸河)가 합류하는 청하구(淸河口)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수심이 깊고 난하에서 살짝 비켜 들어가 있는 곳으로서 장마철이나 태풍이 부는 계절에도 강물의 흐름이나 바람을 피해 배를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기 때문인지 지금도 선착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진짜 고려의 국제무역항 예성항 벽란도(碧瀾渡)였던 곳이고,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벽란정(碧瀾亭)이 있었다.
[참고]
고려도경 해도편 중
6월 10일 신묘일
진시(오전7∼9시)에 서북풍이 불어 8척의 배가 움직이지 못했다.
도할관 오덕휴와 제할관 서긍은 상절을 모시고 다시 채주를 타고 관사에 갔다가 제물사에 들렀다.
그곳에서 원풍 연간(A.D.1078∼1085)의 사신 고 좌반전직 송밀을 위해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배로 돌아갔다.
사시에 조류를 타고 올라갔다.
이날 미시(오후 1∼3시)에 급수문에 도착했다.
그 관문은 해도(바다섬)와 다른 것이 흡사 무협의 강 흐름 같았다.
산으로 둘러싸여 굴곡을 이루면서 꾸불꾸불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사이로 강물이 흐른다.
물의 형세가 산골짜기에 따라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는데, 천둥소리처럼 요란하고 쇠뇌의 화살이나 바람을 쫓을 수 있는 말이라 해도 그 급한 물살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이르면 돛을 펼쳐서는 안 되고 다만 노를 저어 조류를 따라 전진해야 한다.
신시(오후 3∼5시)가 다되어 합굴에 정박했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았으므로 주민도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의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제사를 지낸다.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오는데, 급수문의 물색과 비교하면 황백색으로 변했다.
분수령은 곧 두 산이 마주보고 있는 소해인데 여기서부터 물이 나뉘어 흐른다.
물빛은 다시 매잠을 지날 때처럼 혼탁해졌다.
6월 11일 임진일
아침에 비가 내리고 오시에 물이 빠지며 비가 더욱 심해졌다.
국왕이 유문지를 시켜 글을 보내왔는데 정사가 예를 갖추어 받았다.
유시에 전진하여 용골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6월 12일 계사일
아침에 비가 그쳤다.
정사, 부사가 신주로 옮겨 타고 강물을 따라 예성항에 이르렀다.
오시에 정사, 부사가 도할관, 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주로 조서를 봉안했다.
1만 명이나 되는 고려 군사들이 병기, 갑옷 입힌 말, 기치, 의장물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들이 담장같이 둘러섰다.
채주가 해안에 이르자 도할, 제할관이 조서를 채색 가마에 봉안했다.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고 정사, 부사는 뒤에서 따라갔으며 상절, 중절은 그 다음으로 따라갔다.
벽란정으로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고 그 일이 끝나자 지위에 따라 나뉘어 휴식을 취했다.
6월13일 갑오일
길을 따라 (고려) 왕성(개경)으로 들어갔다.
[참고]
[조선시대 고지도 해동지도에 한반도 예성강(禮成江) 하구에 벽란도(碧瀾渡)라 표시해 놓았는데, 사실 이곳은 고려 때의 국제무역항 벽란도가 아니다. 조선초에 대륙의 해동에서 동국인 한반도로 도읍을 옮겨 온 후 대륙의 벽란도를 한반도의 비슷한 위치에 표시해 놓은 것 뿐이다. 그리하여 고려도경의 기록에 나타나는 지형과도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