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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기록 속 오골성(烏骨城)과 비사성(卑沙城)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5. 1. 11. 09:01

윤여동설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기록 속 오골성(烏骨城)과 비사성(卑沙城)의 위치를 찾았다 최초공개

 

 

[오골성(烏骨城) 추정지(하북성 흥륭현 동북) 좌표 : 동경1173252초 북위402930]

 

[비사성(卑沙城) 추정지(난하 중류 유하구 부근) 좌표 : 동경1181305초 북위403608]

 

  서기 645년 당 태종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의 일이다.

  이때 당 태종이 직접 이끄는 당나라군의 원래 작전계획은, 안시성(安市城)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건안성(建安城, 필자주 : 옛 평곽성)도 함락시킨 후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성(平壤城)으로 향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으나 안시성(安市城)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장수들이 당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은 노둔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지 못하고 있을테니 군사를 옮겨 가기만 한다면, 아침에 가서 저녁에 이길 것이요, 나머지 길목에 있는 작은 성들은 제풀에 꺾여 달아나고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뒤에 그의 군기와 군량을 거두고 북을 울리면서 진군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평양(平壤, 평양성)은 필히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말하기를, “장량(張亮)의 군사가 비사성(卑沙城)에 있으니 그들을 부르게 되면 이틀(2)이면 올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민심이 흉흉한 때를 타서 (장량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오골성(烏骨城)을 함락시키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면[필자주 : 안시성에서 오골성으로 우회한다면 먼저 압록수를 건너 오골성으로 향해야 한다]평양은 바로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황제가 이 말을 쫓으려 하였는데, 홀로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말하기를 천자께서 친히 원정을 하는 것은 일반 장수들과 달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建安城)과 신성(新城)의 적들이 아직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일 오골성(烏骨城)으로 우회한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하니 먼저 안시성(安市城)을 깨뜨리고 건안성(建安城)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연후에야 군사를 멀리 몰고 나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하니 황제가 곧 중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

  안시성(安市城)은 북경 북쪽 회유현(懷柔縣) 발해진(渤海鎭),

  신성(新城)은 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고성(宣化古城),

  비사성(卑沙城)은 지금의 난하(灤河) 중류 강변 동쪽에 위치한 하북성 흥륭현(興隆縣) 왕가장(王家庄) 일원의 옛 고성터,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임을 앞서 필자가 밝혀냈었는데, 유독 이 오골성(烏骨城)의 위치는 찾기가 매우 난감했었다.

  왜냐하면 단서라고는 안시성(安市城)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우회하여 가는 길목에 위치한 성이라는 것과 오골성(烏骨城)이라는 이상스런 이름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중국 도읍인 북경(北京)이 고대의 요동(遼東)임을 필자가 이미 밝혀 놓았고, 북경시 회유현 발해진이 안시성(安市城)임도 필자가 이미 밝혔으며, 하북성 난평현이 건안성(建安城, 옛 평곽성)임도 필자가 이미 밝혀 놓았으니, 안시성(安市城)으로부터 평양성(平壤城)까지 가는 동쪽 또는 서쪽의 우회로에서 까마귀()와 관련 있는 지명이나 지형을 찾으면 그곳이 곧 고구려의 오골성(烏骨城)일 가능성이 많을 곳일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오골성(烏骨城)의 위치를 찾아보고, 왜 당나라 장수들이 수군인 장량이 이끄는 비사성(卑沙城)의 군사들을 부르면 이틀(2)이면 오골성까지 올 수 있다고 말했는지 검토해 보기로 하자.

 

  앞서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의 정주(定州)에서 군사들을 출발시켜 동북쪽 방향에 위치한 요동(遼東, 필자주 : 지금의 북경을 말한다)을 향하여 출발하였었다.

  그리고는 중간에 갈석산(碣石山, 필자주 : 지금의 중국 하북성 보정시 북쪽의 낭아산을 말한다)에 올랐고, 진군을 계속하여 요택(遼澤)을 지나고 요수(遼水, 필자주 : 지금의 영정하를 말한다)를 건너 요동(遼東, 필자주 : 지금의 북경을 말한다)에 도착하여, 우여곡절 끝에 요동성(遼東城)과 백암성(白巖城)을 함락시킨 후 안시성(安市城, 필자주 : 북경 북쪽 회유현 발해진을 말한다)으로 향하였었다.

  그런데 이 안시성(安市城, 필자주 : 옛 고구려의 환도성이었다)이 토산을 쌓는 등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공격해 보았으나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 태종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날씨는 점점 추워오고 있었고, 군사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러한 당 태종의 조급한 심정을 간파한 장수들이 함락되지 않고 있는 안시성(安市城)은 그대로 두고, 오골성(烏骨城)으로 우회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사실 당 태종은 처음부터 직감적으로 안시성(安市城)이 께름직했던지 안시성을 공격하지 말고 건너뛰어 건안성(建安城)을 먼저 공격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기록을 보면, “황제가 백암성(白巖城, 필자주 : 요동성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던 성이다)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이세적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성(安市城)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재질이 용맹하여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켜 항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했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성을 그에게 주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건안성(建安城)은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으니 그들이 뜻하지 않고 있을 때 치게 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건안성(建安城)을 먼저 쳐야 하는 바 건안성이 항복한다면 안시는 우리의 뱃속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병법에서 공격하지 않을 성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하니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성(建安城)은 북쪽[필자주 : 원문은 남쪽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가 확실하므로 필자가 바로 잡았다]에 있고, 안시성(安市城)은 남쪽[필자주 : 원문은 북쪽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가 확실하므로 필자가 바로 잡았다]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모두 요동(遼東, 요동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시성을 건너 뛰어 건안성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 군사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끊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치느니만 못할 것이니 안시성이 항복한다면 북을 울리면서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그대의 계책을 좇지 않겠는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는데, 당 태종의 예감대로 역시 안시성(安市城)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렇다면 오골성(烏骨城)이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기에 당나라 장수들은 오골성으로 우회하여 평양성(平壤城)으로 가자고 건의했었으며, 지금의 난하 중류 강변에 위치하고 있던 비사성(卑沙城)의 장량의 군사를 부르면 2(이틀)이면 오골성까지 올 수 있다고 했던 것일까?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 필자주 : 발해이다)를 건너 [패수(필자주 : 지금의 난하이다)를 타고 올라가]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성의 사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때 정명진이 군사를 데리고 밤에 도착하고 부총관 왕대도가 성에 선봉으로 올랐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명이 여기에서 죽었다.

 

  필자가 찾아낸 오골성(烏骨城) 추정지는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하북성 흥륭현(興隆縣)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좌표는 동경1173252초 북위402930초 일원으로서 지금의 발해 북쪽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의 무령산진(霧靈山鎭)과 평안보진(平安堡鎭)의 사이 지역으로서 그곳의 지형이 한마리의 새(까마귀?)처럼 생겼다.

  특히 지금의 흥륭현과 응수영자광의 중간에 위치한 평안보진(平安堡鎭)에는 유하(柳河)가 심하게 굴곡을 이루며 흐르는 곳이 있는데, 마치 새의 부리처럼 생겼다. 지형이 이랬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무령산진과 평안보진 사이의 지형을 까마귀처럼 생겼다고 보아 그 산성을 오골성(烏骨城)이라 명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당나라군은 북경 북쪽 회유현에 위치하고 있던 안시성(安市城)에서 밀운수고(필자주 : 압록수이다)를 건너 고북구를 지나 난평현에 있던 건안성을 통과하여 하북성 승덕시의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으로 진군하려고 했었으나, 안시성 때문에 그것이 여의치 않자 방향을 바꾸어 동쪽의 하북성 흥륭현(興隆縣) 방향으로 우회하여 자비령(慈悲嶺)을 넘거나 지금의 유하(柳河)를 따라 행군하여 난하(필자주 : 패수이다)와 유하가 합류되는 유하구(柳河口)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난하(패수)를 따라 올라가 평양성인 하북성 승덕시로 가려고 했던 것이고, 또 유하구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비사성(卑沙城)의 장량의 군사(필자주 : 수군이었다)를 부르면 하북성 흥륭현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오골성(烏骨城)까지 2(이틀)이면 올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오골성(烏骨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흥륭현(興隆縣) 동북쪽 무령산진(霧靈山鎭)과 평안보진(平安堡鎭)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성이었고, 비사성(卑沙城)은 지금의 난하 중류 유하구(柳河口)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성이었다.

 

위 그림과 비교하며 전쟁 기록을 읽어 보시면 필자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