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흘승골성(紇升骨城,訖升骨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 최초주장
[고조선(왕검조선)은 한반도가 아닌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조선(古朝鮮)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이고,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은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을 말하는 것이다]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북부여의 도읍 흘승골성(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좌표 : 동경115도49분24초 북위40도54분46초]
[풍광이 매우 웅장하여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는 졸본부여의 도읍 졸본(북경 북쪽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좌표 : 동경116도03분54초 북위40도41분35초]
삼국유사 북부여 조를 보면,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3년 임술(壬戌) 4월 8일에
[필자주 : 신작3년은 기원전 59년 임술년을 말하는 것인데, 이 연호는 일연선사의 착각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해모수가 기병한 해는 이로부터 무려 180년 전인 기원전 239년 임술년 사월 초파일로서 고조선(왕검조선) 말기였고 중국의 진시황 때였기 때문이다. 전한서 권1상 고제기 제1상 4년(B.C.203)조의,“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북맥과 연나라가 용감한 기병을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는 기록이 바로 북부여 해모수가 한(漢)나라에 군대를 보내 전한 고조 유방을 도와주었다는 증거기록으로서, 북부여가 전한(前漢) 보다 건국 시기가 빨랐기 때문에 북부여 해모수 천제가 군사를 보내 유방의 한(前漢)나라 건국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천제(天帝)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필자주 : 북부여 해모수가 도읍했던 곳이 흘승골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졸본부여를 기반으로 일어난 고구려의 첫도읍은 졸본(홀본)이지 흘승골성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흘승골성의 위치가 요나라 의주 경계에 있다는 이 기록은 명백한 오기로서, 이 잘못된 기록 한 줄 때문에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헷갈리고 있는 듯하다. 아마 이 기록은 앞서 출간된 삼국사기지리지 고구려 조의 잘못된 기록을 보고 삽입해 놓았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삼국사기에는 紇升骨城(흘승골성)이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필자주 : 해부루(解扶婁)는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라 증손자 또는 고손자였다]
(북부여)왕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겼다.
[필자주 : 상제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아리송한데, 동부여 조에는 천제(天帝)라 하였다. 그리고 이때 북부여는 그 땅을 졸본부여에게 빼앗기고 쫓겨간 것인데, 이때 해부루(解扶婁)가 북부여의 유민들을 이끌고 창해군 예(濊)의 가섭원 땅으로 옮겨가서 그곳을 차지하고 동부여를 세웠다]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는데, 이가 곧 고구려의 시작이었다.’ 아래를 보라
[北扶餘 古記云“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于訖升骨城 在大遼醫州界 乗五龍車立都 稱王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移都于東扶餘 東眀帝継北扶餘而興立都于卒本州爲卒本扶餘 即髙句麗之始 見下]”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윗글을 보면,
흘승골성(紇升骨城, 訖升骨城)은 북부여의 도읍이었고,
졸본(卒本)은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도읍이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앞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이다.
후한서에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3,600리 떨어진 곳이라고 했던 요동군(遼東郡)이다.
그리고 옛 단군왕검의 넷째아들인 부여(扶餘)에게 봉해진 곳은 고조선의 서쪽 강역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그 치소 역시 왕검성(王儉城)의 서쪽 방향에 위치했던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이었고,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도읍 졸본(卒本)은 그 남쪽 지금의 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후성진(后城鎭)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북부여가 도읍했던 흘승골성(訖升骨城, 삼국사기에는 紇升骨城이라 하였다)이라는 곳은 옛 부여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북경 서북쪽 하북성 적성현(赤城縣)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그 남쪽 후성진(后城鎭)에 위치했던 졸본부여(卒本扶餘)의 북쪽 방향에 위치한다하여 북부여(北扶餘)라 불렸을 것이다.
☆ 북부여의 도읍 흘승골성(訖升骨城,紇升骨城)이 지금의 중국 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이었음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될 경우, 그곳은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현장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이고,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부근에서 옛 고조선 단군왕검의 넷째아들 부여의 후손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북부여 해모수(解慕漱)와 그 후손왕들의 왕릉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자.
따라서 흘승골성이나 졸본은 요(遼)나라 때의 북진 의무려산(醫巫閭山)이나 의주(醫州)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대 원래의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방산(房山)의 상방산(上方山)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필자주 : 지금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있는 북진과 의무려산은 후대인 명, 청대에 지명이 옮겨진 가짜 북진과 가짜 의무려산이다]
또한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 역시 한반도 개성이 아니라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을 말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찬자들은 편찬 당시 흘승골성이나 졸본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그 땅이 고려의 강역 밖에 위치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 그림을 보시라.
[참고1]
북부여기(상)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 원년(기원전 239년)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壬戌, 기원전 239년) 4월 8일이다.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蘭邊)에 쌓고,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광(龍光)의 검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탔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필자주 : 삼국유사에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이라 하였고, 삼국사기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하였다]
계해 2년(기원전 238년) 이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烟戶)의 법을 제정하고,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기사 8년(기원전 232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니 마침내 공화(共和)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필자주 : 옛 도읍이라는 곳은 고조선의 백악산아사달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으니 이른바 북부여의 시조이다.
겨울 10월 공양태모의 법(公養胎母之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胎敎)로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신 11년(기원전 229년) 북막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경진 19년(기원전 221년) 기비(箕丕)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을 그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이전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을 국경으로 삼게 되었었다.
신사 20년(기원전 220년) 명을 내려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도록 하고,
7월 (흘승골성에)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천안궁(天安宮)이라 이름하였다.
계미 22년(기원전 218년)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왕정(秦王政, 진시황을 말한다)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차(副車)를 박살 냈다.
임진 31년(기원전 209년) 진승(陳勝)이 난을 일으키니 진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燕)․제(齊)․조(趙) 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 와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운장(雲障)에 나누어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기해 38년(기원전 202년) 연(燕)나라 노관(盧綰)이 다시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 필자주 : 요수의 오기일 것이다)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浿水)는 오늘날의 난하(灤河)이다.
병오 45년(기원전 195년)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결재하지 않았었는데,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서 붕어하시어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내니 태자 모수리(慕潄離)가 즉위하였다.
[北夫餘紀(上)
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
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依熊心山而起策室蘭濱戴烏羽冠佩龍光劍乘五龍車與從者五百人朝則廳事暮登天至是郞位
癸亥二年是歲三月十六日祭天設烟戶法分置五加之兵屯田自給以備不虞
己巳八年帝率衆往諭故都五加遂撤共和之政於是國人推檀君是爲北夫餘始組也冬十月立公養胎母之法敎人必自胎訓始
壬申十一年北漠酋長山只喀隆襲寧州殺巡使穆遠登大掠而去
庚辰十九年丕薨子準襲父封爲番朝鮮王遣官監兵尤致力於備燕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
辛巳二十年命祭天于白岳山阿斯達七月起新闕三百六十六間名爲天安宮
癸未二十二年滄海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狙擧秦王政于博浪沙中誤中副車
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
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浿水今灤河也
丙午四十五年燕盧綰叛漢入凶奴其黨衛滿求亡於我帝不許然帝以病不能自斷番朝鮮王箕準多失機遂拜衛滿爲博士劃上下雲障而封之是歲冬帝崩葬于熊心山東麓太子慕漱離立]
[참고2]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조
“한서지에 이르기를 ‘요동군(遼東郡)은 낙양과의 거리가 3,600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써 무려현(無慮縣) 있었으니 바로 주례에 이른바 북진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에서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토군(玄菟郡)은 낙양과 동북으로 4,000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이 셋인바 고구려현(高句麗縣)이 그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은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이라는 곳이 아마 한(漢)나라 현토군(玄菟郡)의 경내이며,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 동경요양부)의 서쪽인 듯하니 한서지에 이른바 현토군의 속현으로서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인가 한다.
옛날 대요(요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의 임금의 연경(燕京, 남경석진부)에 있었는데, 우리(고려)의 입조 사신들이 동경(동경요양부)를 통과하고 요수(遼水)를 건너서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醫州)에 당도하여 연경(燕京), 계주(薊州)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음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필자주 : 주몽은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적이 없고, 졸본에 정했다] 40년을 지나서 유류왕(유리왕) 22년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주 : 삼국사기에 왜 이렇듯 말도 안되는 기록이 삽입되어 있는지 참 이해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지리지를 편찬한 찬자들은 무슨 이유로 무려(無慮)와 의무려(醫巫閭)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리고 또 삼국사기 본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지를 졸본(卒本)이라고 기록해 놓고서는, 지리지에서는 흘승골성이라고 하였으니 앞 뒤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따라서 최소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지리지보다 삼국유사가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3]
삼국유사 동부여(東扶餘)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신하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써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너는 이곳을 피하라. 소위 동명이 장차 일어날 조짐이다. 동해 해변에 가섭원(迦葉原)이라 하는 땅이 있는데, 토지가 기름져서 왕도를 세울 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란불이 (해부루)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도록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부루가 늙어 자식이 없으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구하였더니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향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어보니 금빛 개구리 형상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서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주시는 아들이로다.”하고는 곧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자라매 태자로 삼고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다음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으나, 지황(地皇) 3년 임오(壬午)에 이르러 고(구)려왕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이를 치고 대소왕을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필자주 : 동부여는 이때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고, 한참 후대인 고구려 문자왕 때 이르러서야 고구려에 나라를 들어 바치고 멸망했다]
[東扶餘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夢天帝降而謂曰“將使吾子孫立國於此汝其避之 謂東明将興之兆也 東海之濵有地名迦葉原 土壌膏腴冝立王都.” 阿蘭弗勸王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夫婁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 所乗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流 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児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飬之名曰金蛙 及其長為太子 夫婁薨金蛙嗣位爲王 次傳位于太子帶素 至地皇三年壬午髙麗王無恤伐之殺王帶素 國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