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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바보온달은 한반도에서 죽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2. 3. 21:40

윤여동설 - 바보온달은 한반도에서 죽지 않았다 - 최초주장

 

 

 

『온달은 고구려 25대 평강왕(평원왕, 재위 559-590)시대 사람이다.
  그의 용모는 용을 닮았으나 동냥그릇을 들고 맨 날 웃고 다녔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걸식으로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찢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거리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온달이라 불렀다.
  고구려 25대 평원왕의 딸이 어려서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항상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도 필시 사대부의 아내가 되기는 틀렸으니 바보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하였는데, 왕이 그런 말을 자주 하였다.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상부 고씨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였더니 공주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필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에 이르러 그 말을 바꾸려 하십니까?
  필부도 식언을 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지존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임금은 우스개 소리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왕의 명령이 잘못 되었기로 받자올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내 딸로 인정할 수 없으니 어찌 한 지붕 밑에서 살 수 있겠느냐? 당장 보따리 싸 가지고 너 갈 데로 가거라" 하였다.
  이에 공주가 진귀한 보물과 팔찌 수십 개를 손목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온달의 집이 어디인가를 물어 찾아갔다.
  온달의 집에 이르러 앞못보는 노모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온달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노모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가난하고 초라하여 귀인이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오. 지금 낭자에게서 향긋한 분 냄새가 나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솜털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데,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소만 내 아들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갔소" 하였다.
  공주가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온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공주가 그의 집에서 나와 산 아래에 이르러 나무껍질을 지고 돌아오는 온달을 만났다.
  공주가 온달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온달이 말하기를,
  "여기는 젊은 여자가 다닐 만한 곳이 아니니 이는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이거나 귀신이로구나. 가까이 오지 말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공주가 쓸쓸히 돌아와 대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온달 모자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하였으나 온달은 긴가 민가 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지리도 못나 귀인의 짝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하여 귀인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오"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한 말의 곡식이라도 같이 나누어 먹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같이 기워 입을 수 있다고 했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부자이고 귀하여야만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금팔찌를 팔아서 밭과 집, 노비, 소, 말과 살림도구를 사들이니 어엿한 한 살림이 갖추어졌다.
  말을 살 때는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시장에 나온 일반 말을 사지말고, 나라에서 사용하던 말로서 수척하여 버리게 된 것을 골라 사야 합니다"라고 하여 온달이 그대로 따랐다.
  공주가 부지런히 말을 기르니 나날이 살이 찌고 건강하여졌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3일에 낙랑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여 그 잡은 멧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군신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갔다.
  이 때에 온달이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참가했는데, 온달이 항상 앞서 달렸으며, 잡은 짐승도 가장 많아 온달을 따를 자가 없었다.     
  왕이 온달을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는 놀랐으나 한편으로는 기특하게 여겼다.
  이때에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하여 요동을 침략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벌판에서 맞받아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질풍같이 내달려 적병 수십 명의 목을 베니 이때를 틈타 모든 군사들이 힘껏 싸워 크게 이겼다. 공을 말할 때 모두들 온달의 공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나의 사위로다" 하고는 예를 갖추어 사위로 삼고, 그에게 대형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
  이런 연유로 그에 대한 왕의 총애가 두터워졌으며, 위엄과 권세가 날로 번성하였다.
  그 후 양강왕(영양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온달이 말하기를,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북쪽지역을 빼앗아가 자기들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원통하고 한스럽게 생각하여 모국을 잊지 못하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저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저에게 군사를 내어 주신다면 단번에 우리의 땅을 탈환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  하였다.
  온달이 떠날 때에 맹세하기를,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 지역을 탈환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드디어 출전하여 아단성(아차성) 아래에서 신라 군사와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그를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으니,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생사가 이미 정해졌오. 이제 그만 당신 갈 길로 가시오." 하니 그제야 관이 들리어 장사 지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이상은 삼국사기 온달열전 전문이다.

 

☆ 지금도 몽골, 내몽골에는 온달이라는 이름이 많다고 한다. 

이를 보면 온달은 원래 지금의 몽골이나 내몽골 사람이 아니었다 싶다.

당시 요동이 지금의 북경부근을 말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이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며, 내몽골 정람기 부근이 동부여였음을 감안하면 온달이 지금의 몽골, 내몽골인이라고 하여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바보 온달은 그대로 살았으면 평생을 바보처럼 살다가 일생을 마칠 위인이었으나 현명한 아내 평강공주를 만나 부귀와 공명을 함께 이룬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그의 이름은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온달은 공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결국 나라의 장군이 되었고, 또 나라를 위하여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장수가 싸움터에서 죽는 것은 당연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온달이 비천한 몸을 일으켜 나라를 위하여 몸바치게 됨으로써 그의 이름이 후세에 영원히 전해지게 된 것은 모두 평강공주의 덕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 둘은 하늘이 점지해 준 천생연분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 후주란 북주를 말하는 것으로서 3대인 무제의 재위년도는 560- 578년이었는데, 아마 북주 무제 초기에 고구려를 침공했었던 듯 하고, 이때 온달의 나이는 20세쯤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온달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양왕(재위 590-618) 초기 그의 나이는 약 50세가 된다.      

 

  그렇다면 위 기록에 나타나는 장소 즉 온달이 탈환하려 했던 한수 북쪽, 죽령서쪽지역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충북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쌓은 성이라 하고, 그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백산맥을 넘는 죽령이 바로 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죽령이라 하며, 고구려의 온달장군과 결부시켜 역사를 해석하려 하지만 사실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탈환하기 위해 신라군과 다투었던 한수 북쪽, 죽령 서쪽 땅은 한반도의 충북 단양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신라, 백제, 고구려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신라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호로도시 일원, 백제는 하북성 당산시,진황도 일원, 고구려는 하북성 장가구시, 승덕시, 내몽골 적봉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신라와 고구려가 다투었던 곳은 하북성 진황도 도산(都山) 부근이었다.  
 

☆ 지금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고북구 부근은 후한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살수이남 땅에 설치했던 옛 후한 낙랑군 땅이었는데, 313년 고구려 15대 미천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그 땅을 병합함으로써 고구려 땅이 되는 곳이다.
  그러다가 신라 진흥왕 때인 550년에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공방을 펼치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신라가 두 나라 군사들이 기진맥진해진 틈을 이용해 두 성을 갑자기 쳐서 빼앗아 신라의 소유가 되는 것을 시작으로 신라는 수나라의 고구려 2차 침입 때인 612년에는 두 나라가 전쟁을 하는 틈을 이용해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게 된다.
  온달장군이 한수 북쪽(한산북쪽) 땅을 탈환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이후 고구려는 더욱 넓은 땅을 신라에게 빼앗기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 기록 속의 한수란 지금 서울의 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에 있는 도산(백제의 북한산으로 비정되는 산이다)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백제가 건국된 곳도 바로 그  부근이지 한반도의 서울이 아니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을 보면, 죽령 서쪽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죽령 서쪽 땅이란 지금의 도산 부근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온달장군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 부근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록에 나타나는 죽령이란 지금의 하북성 도산(都山:북한산으로 비정되는 산이다) 부근으로 비정되고, 계립령이나 그가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았다는 아단성(아차성) 역시 그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곳 대륙에서 신라에게 빼앗긴 지금의 도산 북쪽 땅을 되찾으려 하다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온달장군은 한반도에서 죽지 않았다.  
  온달장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에 있는 도산(都山) 부근에서 약 50세의 나이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