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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실패한 백제 최초의 수렴청정 - 팔수태후

윤여동 2007. 12. 4. 08:19

윤여동설 - 욕정에 눈이 멀어 명을 재촉한 구이신왕의 어머니 팔수태후

 

  백제 18대 전지왕의 왕비 이름은 팔수이다.
  전지왕의 아버지는 17대 아신왕이고 어머니는 해씨였고, 아신왕의 아버지는 15대 침류왕이고 어머니는 진씨였고, 침류왕의 아버지는 14대 근구수왕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이었다.

 

[가계도]
                                  14대 근구수왕 = 아이왕비(진씨)
                   

                     .............................|.......................
                    ↓장자                                            ↓차자
             15대 침류왕 = 왕비진씨                    16대 진사왕 = ?(진씨)
       

          ....................|....................................
        ↓장자                         ↓차자    ↓3자   ↓4자
 17대 아신왕 = 왕비해씨   홍      훈해    첩례                    
        ↓
 18대 전지왕 = 팔수왕비 = 왕비해씨
                     ↓                        ↓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아신왕과 그 형제들은 침류왕비 진씨의 소생이었으나, 아신은 진씨가 아닌 해씨 집안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후일에 이르러 해씨 소생인 전지를 태자로 봉했다.  
  아신이 이렇듯 해씨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아버지인 침류왕이 죽고 숙부인 진사왕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을 때, 자기의 외가인 진씨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진씨들이 진사왕의 편에 섰기 때문에 아신은 해씨들과 힘을 합할 수밖에 없었다.
  해씨들은 옛날 비류를 도와 비류백제를 세웠던 호족들이었으나 비류백제가 온조십제에게 병합된 이후 400여 년 간이나 외척인 진씨들의 위세에 눌려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신은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해씨 집안 여자와 혼인을 함으로써 해씨들의 지원을 받아 후일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왕비 해씨 소생인 전지를 태자로 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는 아신왕 5년인 서기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한성을 함락 당하여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무릎 꿇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했고, 포로 1천명,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홍과 대신 등 10여명을 볼모로 보냈으며, 58개성과 7백개 촌을 고구려에게 빼앗겨야 했다.
  그러자 아신왕은 그 다음해인 서기 397년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인 전지를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이는 아신왕이 왜국의 힘을 빌려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신왕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때 아신왕의 아들인 전지태자는 왜국에 볼모로 가 있었다.
  그런데 서기 405년 9월 그 아버지인 아신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전지태자에게 전해지자 전지태자는 왕위를 잇기 위하여 귀국 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왜국왕은 군사 1백 명으로 하여금 귀국하는 전지태자를 안전하게 백제까지 호위하여 주도록 배려한다.
  이때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죽자 그 동생인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전지태자가 귀국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전지는 왜국을 출발하여 백제의 도읍인 한성(현 하북성 당산시 천서)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바다를 건너 한수(현 난하)를 타고 올라가 한성 남쪽(현 천안 부근)에 도착했을 때 한성 사람 해충이라는 사람이 와서 전지태자에게 보고하기를, "왕의 막내아우인 첩례가 그 형(훈해)을 죽이고 자기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십시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전지는 할 수 없이 섬에서 호위군사인 왜인들과 함께 머물러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며칠,
  전지왕의 동생인 여신과 해수, 해구 등 해씨들이 주축이 되어 스스로 왕위에 오른 전지의 막내 삼촌인 첩례를 제거한 후 전지태자를 받들어 왕위에 올리게 된다. .
  전지왕의 아버지인 아신왕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홍, 훈해, 첩례가 그들이었다.
  홍은 서기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한성을 함락 당했을 때에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졌으므로, 아신왕이 죽자 그 아래 동생인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인 전지가 왜국에서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막내인 첩례가 반정을 도모하여 그 형인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첩례가 반정을 도모한 것은 해씨 소생인 전지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모든 권력을 외척인 해씨들이 쥐게 될 것을 염려한 진씨들이 첩례를 앞세워 반정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씨들은 처음에는 첩례의 형인 훈해에게 반정을 도모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요청했으나 훈해는 말하기를,
  "지금 나라가 둘로 쪼개져 있고(대륙백제와 반도백제를 말함), 전에 부왕이 붕어 하시고, 숙부인 진사왕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을 때 해씨들의 힘을 빌려 죽은 형 아신이 왕위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왕께서는 해씨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해씨 소생인 전지를 태자로 봉했었다.
  우리들 역시 해씨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해씨와 진씨는 적이 아니다. 서로 힘을 합하여 태자인 전지를 중심으로 약해진 나라를 다시 부흥 시켜야 한다.
  지금 태자가 환국 중에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말고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라고 나무랐다.   
  그러자 진씨들은 이번에는 막내인 첩례를 꼬드겨 함께 반정을 도모하여, 훈해를 죽여버리고 첩례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위를 찬탈 당한 해씨들은 첩례를 위시한 진씨들과 일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앞장선 사람들이 전지의 집안동생인 여신과 해수, 해구 등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첩례를 앞세운 진씨들을 타도하고 승리하여 전지를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되어 해씨들은 이후 23대 삼근왕 때까지 70여년 간 백제의 온갖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게 된다.       
  진씨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을 움켜쥔 해씨들은 전지왕과 해씨 가문의 두 여인과 혼인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가 곧 팔수왕비와 이름이 전하지 않는 20대 비유왕의 어머니 되는 여인이었다.

 

☆ 일부 학자들 중에는 전지왕이 태자로써 왜국에 볼모로 가 있을 때 그곳에서 혼인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팔수왕비가 왜국 응신천황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전지왕이 35세쯤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자 겨우 10세쯤의 아들 구이신이 19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죽은 전지왕의 왕비였던 팔수는 왕의 어머니로써 태후가 되어 백제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팔수는 왕태후가 되자 여신, 해수, 해구 등을 멀리하고 왜국사람인 목만치를 정부(情夫)로 끌어들여 온갖 난잡한 행동을 일삼고, 목만치에게 권력을 주어 국정을 농단한다.

 

☆ 일본서기 응신천황 25년 조를보면
  "백제의 직지왕(전지왕)이 죽었다. 아들인 구이신이 왕이 되었다. 왕은 나이가 어렸다. 목만치가 국정을 집행하였다. 왕의 어머니와 간음하여 무례하게 행하여지는 것이 많았다. 천황이 듣고 불러 들였다.
  [백제기에 이르기를 '목만치는 원래 목라근자가 신라를 토벌할 때 그 나라의 여자를 취하여 낳았다. 그러므로 그 아비의 공으로 임나의 일을 전담하였다. 백제와 왜국(귀국)을 왕래하였다. 왜국(천조)의 제도를 백제에 집행하였다. 권세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컸다.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불러 들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약 팔수가 왜국 응신천황의 딸이었다면 자기 나라 공주를 욕되게 하는 이러한 기록을 일본서기에 남겨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팔수는 전지왕이 귀국 후 맞아들인 해씨 집안 여인임이 틀림없다.

 

  한편 왕태후의 행동이 난잡하고, 절도가 없으며, 왜국 사람인 목만치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자 왕의 집안 아저씨인 여신과 해수, 해구 등은 모여 상의를 하였다. 상좌평인 여신이 말하기를,  
  "우리가 20년 전 진씨들을 타도하고 전지태자를 왕위에 올린 것은, 약해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강국으로 만들려는 충정에서 목숨을 걸고 대사를 도모했었다. 대사가 성공하여 해씨 집안 두 딸로서 전지왕의 왕비를 삼아 해씨의 외손으로서 대대손손 왕위를 잇도록 하려고 했다.
  전지대왕이 죽고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해씨 집안 여인인 팔수왕비를 믿고 왕태후로 삼아 섭정을 하도록 조치했었다.   
  그런데 왕태후가 전일의 은혜를 잊고, 해씨 집안도 돌보지 않고, 왜국인 목만치와 난잡한 행동을 일삼고 모든 권력을 목만치에게 위임하여 지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 하다.
  비록 왕태후가 해씨 집안 사람이지만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 한번의 내부 반정을 도모하여, 팔수태후와 구이신왕을 제거하고 전지왕의 다른 왕비 해씨 소생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이가 곧 백제 20대 비유왕이다.
  목만치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왜국으로 도망갔다.
  팔수가 태후로서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고 구이신왕이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수렴청정을 잘 하였더라면 이후 백제의 왕위는 그녀의 후손들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경솔하게 행동했고, 욕정에 눈이 멀어 주변 실세들을 멀리하고 엉뚱하게도 왜국 사람 목만치를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인 구이신왕의 명까지 재촉하고 말았던 것이다.
  백제 최초의 수렴청정은 이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