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설화 - 별빛이 입속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은 신라 유례왕의 어머니

윤여동 2007. 12. 5. 00:21

별빛이 입 속으로 들어가 임신되어 아들을 낳은 신라 유례왕의 어머니 

  
  삼국사기 신라본기 11대 조분이사금 조를 보면,
  "왕비는 아이혜부인인데 나해왕의 딸이다" 라는 기록이 보이고,
  14대 유례이사금 조에는,
  "조분왕의 장자이다. 어머니는 나음갈문왕의 딸 박씨인데, 그녀가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가 임신이 되었다. 유례를 낳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상적인 혼인관계라면 유례는 조분이사금과 첫 왕비인 아이혜 사이에서 출생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기록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를 보면 조분이사금의 첫 왕비는 나해이사금의 딸이었던 아이혜였으나, 그 후 또 한 명의 왕비 즉 나음갈문왕의 딸 박씨와의 사이에서 유례를 낳았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조분이사금에게 최소한 2명의 부인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유례이사금의 어머니가 유례를 임신하는 과정을 재미있게 기록하고 있다.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가 임신이 되었다?
  생리적으로 여인의 입으로 별빛이 들어가서 임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므로 이 기록은 무언가를 은유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별빛이 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것이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닌 야합을 표현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나해는 조분의 누이와 혼인을 하였고, 조분은 나해의 딸 아이혜와 혼인하였다.
  나해는 조분의 매형이면서 장인이 되고,
  조분은 나해의 처남인 동시에 사위가 되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말이 되지 않겠지만 신라왕실에서는 근친혼을 했으므로 이 정도 관계는 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음갈문왕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고, 그의 딸이 조분이사금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유례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녀는 별빛이 입으로 들어가서 임신이 되었다고 했다.
  이를 보면 조분은 나해의 딸인 아이혜와 먼저 혼인을 하였으나, 얼마 후 또 다른 여인인 나음의 딸과 야합을 하여 임신이 되자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이라고 해석이 가능해 진다. 
  왜냐하면 별빛이 입으로 들어가 임신되었다는 것이 집안이 아닌 별이 바짝이는 밤에 야외에서의 성 관계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 위 글은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추리해본 것 뿐이므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기록을 세밀히 검토해 보면 14대 유례이사금이 11대 조분왕의 장자가 아니라 손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9대 벌휴이사금이 196년에 죽었을 때 벌휴이사금의 두 아들인 골정과 이매는이미 죽어 손자인 나해가 왕위를 이었다고 했는데, 나해이사금은 왕위에 35년 간이나 있었다.
  벌휴이사금이 90세까지 오래 살았다고 보면, 그가 죽은 230년에 그의 손자인 나해는 30세쯤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65세쯤 죽었을 것이고, 뒤를 이어 벌휴이사금의 손자(증손자의 오기로 보인다)인 조분이 230년에 35세쯤의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 18년인 247년에 53세쯤으로 죽고, 다시 그 동생인 점해가 50세쯤에 왕위에 올라 재위 15년인 261년 12월 28일 65세쯤에 죽고, 다시 김씨인 미추가 왕위를 이어 재위 23년인 284년에 죽고, 다시 조분이사금의 장자인 유례가 왕위를 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유례이사금을 조분이사금의 장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조분이사금이 서기 247년에 53세쯤의 나이로 죽었을 때 그의 장자라면 적어도 20∼25세 정도는 되었을 것인데,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 않은 것은 이상하고, 그 후로 조분이사금의 동복동생이었다는 점해이사금이 왕위에 올라 재위 15년에 죽었으니 이때 조분왕의 장자는 35∼40세쯤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성씨가 다른 미추이사금이 왕위에 올라 23년 간 재위했으니 미추이사금이 죽었을 때 조분이사금의 장자는 58∼63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분이사금의 장자로 기록되고 있는 14대 유례이사금이 정말로 조분이사금의 아들이라면 그는 284년에 약 60세쯤에 왕위에 올라 재위 15년째인 298년에 75세쯤의 나이로 죽었다는 말이 되니 믿기 어렵다.        
  따라서 11대 조분이사금은 벌휴이사금의 손자가 아니라 증손자였을 것이고, 유례이사금 또한 조분이사금의 장자가 아니라 손자쯤으로서 30세쯤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45세쯤 죽었을 것이고, 다시 그의 아들 기림이사금이 15세쯤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 13년 만에 30세도 안된 젊은 나이로 죽게 되어 아들을 남기지 못해 왕위는 혈통이 다른 흘해이사금에게로 이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례이사금의 아버지는 조분왕의 아들이었으나 일찍 죽게 되었고, 유례가 나이가 어린 탓에 점해, 미추가 왕위를 대신하게 되었고 늦게야 유례가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이 단순히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추정해 본 것 뿐이라고 했던 것은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조분이사금에게 두 왕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별빛을 먹고 아들을 낳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나음갈문왕의 딸 박씨는 조분이사금의 아들의 부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 왕실의 왕위 계승기록과 혼인관련 기록은 너무도 복잡하고 오류가 많아 그 가계를 정확히 밝힐 수 없어, 아직까지 아무도 그것을 명쾌하게 밝힌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아마 그 진실은 밝혀지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