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2. 7. 01:11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는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사기와는 달리 한 승려가 전국에 흩어져 전해지고 있던 비전의 이야기들을 모아 만든 책이라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는 우리 상고사로부터 후백제까지의 역사를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어 우리 고대역사와 불교의 역사를 동시에 알 수 있게 하는데, 그 내용이 정사인 삼국사기와는 달리 역사의 전면보다는 잘 보이지 않는 역사 뒷면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 우리 역사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책을 만든 목적이 일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찰의 승려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또 일연 개인이 아닌 종단차원에서 삼국유사를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추측하기에, 당시 국존으로서 불교계의 수장 격이었을 일연을 비롯한 고승들이 보기에 삼국사기가 정사로서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져 있었으나 우리의 상고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 역사를 좀더 자세히 기록해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민간이나 사찰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도 모아 승려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함으로써 후세에 전해지게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연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 고려의 불교종단에서는 삼국사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모아 "삼국유사" 라는 책을 짓기로 계획을 세웠고, 신라 중심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전해지는 기록이 많지 않았을 고조선 왕검조선으로부터 시작해 위만조선을 언급했으며, 삼한, 낙랑, 대방, 말갈, 가야, 부여 등에 대하여 기록했다.
  이는 승려들이 비록 세속을 떠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역사를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전해준 순도와 아도에 관한 글을 시작으로 불교에 관한 내용을 뒤에 붙였을 것이다.

 

☆ 일연이 한반도의 경상도에서 태어나 만년에 청도 운문사에서 살다, 군위 인각사에서 열반에 들었다고 하여 운문사에 그의 행적비가 세워져 있고, 인각사에 부도탑과 비가 있으나 발해 북쪽 대륙에서 태어나 대륙에서 열반에 들었을 일연의 부도탑이 한반도에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고, 도읍 개경은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이었으며, 동경[옛 신라의 서라벌(금성)으로서 경주]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고려 때의 경상도는 지금의 진황도, 호로도, 금주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연은 대륙에서 열반에 들었고, 대륙에 부도탑이 세워졌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에 있는 일연과 관련된 유적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가짜일 것으로 여겨진다.

 
  일연은 고려 희종 2년인 1206년 경산에서 출생했다고 하고, 속세의 성씨는 김씨이며, 이름은 경명, 자는 희연, 호는 무극으로 아홉 살에 출가하여 22세에 선과에 급제하고 54세에 대선사가 되었다. 78세 때 고려 충렬왕이 국존으로 책봉했으며, 84세인 1289년 7월 8일 열반에 들었다.
  그의 저서로는 어록2권, 게송잡서3권, 조동오위2권, 조도2권, 대장수지록3권, 제승법수7권, 조정사원30권, 선문점송사원 30권 등 불서 80권이 넘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지금에 이르러서 비문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삼국유사만이 그의 저서로 전해지고 있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삼국유사를 과소평가 하려는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내용 중 "고조선 왕검조선" 조에서 인용했다고 밝힌 위서(魏書)의 기록 즉, 위나라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는데 요와 같은 때였다.”라고 하는 기록이 지금 중국에 전하고 있는 위서에 나타나지 않자, 기록에 있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 엉터리로 기록했다고 하기도 하고,
  또 환웅설화와 왕검탄생설화의 내용을 인용했다고 밝힌 고기(古記)라는 것도 책의 제목으로서의 "고기"가 아니라 단순한‘옛 기록’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해,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내용도 확실하지 않은 어느 옛 기록을 보고 그것을 고조선· 왕검조선 조에 기록했을 것이라고 해석해, 당시 불교 포교를 위해 의도적으로 왕검조선을 신화화함으로써 그 역사를 부정하려 했다고 삼국유사의 내용을 폄훼하는 근거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일은 아닌 듯하다. 
  만약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고조선 왕검조선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부정할 마음이 있었다면 굳이 단군왕검을 언급하며 고조선 왕검조선부터 시작할 일이 아니라 그를 빼버리고 삼한 또는 곧바로 신라에서부터 기록해도 별 문제가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왕검조선 조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오히려 그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또 인용했다고 한 위서가 지금 전해지고 있는 북제의 위수가 지은 위서 외에 또 다른 위서가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의 위서에 단군왕검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내용을 평가절하 하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좀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기(古記)라는 기록은 삼국유사에서만 인용한 것이 아니라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도 삼국유사에 기록되고 있는 내용과 비슷한 설화를 인용하고 있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과 고려의 학자들도 "고기"라는 책의 기록을 인용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古記)’라는 책은 고려시대 말까지 분명히 전해지고 있었으며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책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다고 하여 분명하게 출전까지 밝혀 놓은 "고기"를 그 내용도 모르면서 무조건 부정한다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취할 태도는 아닐 것이다.        
  또한 어느 논자는 삼국유사의 저자가 일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고, 어느 논자는 삼국유사가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저작을 합한 것이라 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고조선 왕검조선 조에서 아사달을 설명하는 주에,
  “或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혹은 이르기를 개성의 동쪽에 있다고도 하고, 지금의 백악궁이라고도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고려의 백악궁이 건축된 연도가 고려 공민왕 때인 서기 1360년이므로 1289년에 죽은 일연이 어떻게“지금의 백악궁이다.”라고 기록할 수가 있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일연의 비문에도 그의 저서로 삼국유사가 언급되지 않고 있음이 그 증거라고 하기도 한다.

 

☆ 일연의 비문에도 삼국유사가 그의 저서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실제 일연이 개인적으로 삼국유사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일연은 불교계 최고의 수장으로서 종단의 대표격이었으므로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종단대표 일연"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을 뿐이지 그가 삼국유사의 직접저자가 아니기 때문에 비문에 그의 저서로 삼국유사가 언급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삼국유사의 최초 간행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 때로 보는 견해가 많고, 때로는 원고 형태로 남아 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간행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간행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옛 조선을 고조선(古朝鮮)으로 표기한 점을 들고 있다.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간행되었다면 옛 왕검조선을 고조선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타당성이 전혀 없는 주장은 아니지만 혹시 옛날 고려시대 때에도 고조선을 나눌 때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를 분명히 하기 위해 "고조선 왕검조선"으로 분류했다면, 이것이 꼭 이성계의 조선을 염두에 두고, 고조선 왕검조선이라 기록했던 것이라고 단언한다는 것은 비약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삼국유사 최초간행본이 발견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는 없겠으나 혹시 조선시대에 이르러 삼국유사를 다시 간행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고조선과 조선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왕검조선을 고조선이라 했고, 또 장소를 명확히 하기 위해 "지금의 백악궁이다(今白岳宮是)"라고 삽입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삼국유사가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닐 것으로 보는 이유는,

  의해편 관동풍악 발연수석기와 탑상편 전후소장사리에“무극이 썼다.”라는 의미인 무극기(無極記)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무극이란 일연의 제자의 호이므로 삼국유사가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닌 것이고, 또 오대산 문수사 석탑기에도 정풍 원년 병자(A.D.1156) 10월 일 백운자기(白雲子記: 백운화상초록 직지심체요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백운화상이 쓴 글로 여겨진다)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그 증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삼국유사가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라 불교 종단차원에서 만든 책이기 때문에 승려들이 모여 공동작업으로 글을 썼을 것인데, 국존인 일연도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써서 보내주자 공동집필진에서 예우 차원에서 그 글을 필자를 밝혀 넣어주었고[필자주 : 제5권 서두에 국존조계종가지산하인각사주지원경충조대선사일연찬(國尊 曹溪宗 迦智山下 麟角寺 住持 圓鏡沖照大禪師 一然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당시 유명한 고승이었을 백운화상도 글을 써서 보내 주자 그 글 역시 예우 차원에서 필자를 밝혀 삽입시켰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보면 종단차원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료를 제공받기도 하고 또 종단차원에서 자료도 수집했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기이편은 고기, 삼국사기 그리고 기타 왕실, 귀족, 호족들에게 전해져 오는 비전의 기록들과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지었을 것이고, 흥법, 탑상, 의해, 감통, 피은, 효선 편은 사찰들에 전해져 오는 비전의 기록들과 전국 사찰 등으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라, 지금으로 말하면 불교종단 차원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책을 간행하면서, 종단의 대표격인 국존 일연의 이름으로 간행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결국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라 볼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삼국유사를 두 가지 시각으로 보고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라는 정사에서 다루지 못한 이면의 역사를 기록하여 전해줌으로써 역사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높게 평가하는 시각과, 다른 하나는 승려의 입장에서 확실하지 않은 역사를 어설프게 기록함으로써 혼란을 가중시키게 되었다고 평가 절하하는 시각인데, 필자는 이 삼국유사가 일연 개인이 지은 것이든 종단차원에서 만든 것이든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 내용이 한반도의 기록이 아니라 대륙의 기록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보고 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볼 때 언뜻 보면 시종 한반도에 관한 기록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지금 대륙 삼국의 기록인 삼국사기를 한반도의 기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이 삼국유사 역시 대륙의 기록인데도 우리 자신들이 그를 착각하여 한반도에 관한 기록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북경 부근인 하북성 승덕시, 당산시, 진황도시, 요녕성 서남부, 내몽골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의 개성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이 바로 고려의 도읍 개경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은 대륙에 있었고 발해국도 대륙에 있었고 고려 역시 대륙이 중심지였다.
  따라서 견훤의 후백제도 대륙에 있었고, 궁예의 태봉도 대륙에 있었다.
  그리고 고려는 대륙신라, 대륙백제, 대륙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건국된 나라였고, 일연은 바로 그 고려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일연이 태어난 곳도 대륙일 테고, 그가 출가한 곳도 대륙이며, 그가 열반에 든 곳도 대륙일 것이다. 
  삼국유사는 한반도에서 쓴 글이 아니며 최초로 간행한 곳도 한반도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필자의 주장에 따라 대륙으로 비정한 다음 다시 읽고 해석해 보라.
  우리가 너무도 큰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삼국유사에 한반도에 관한 내용은 한 줄도 없다.
  기록 속의 장소는 북경 동쪽 부근의 대륙에서 찾아야 한다.
  북경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고, 옛 패수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이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고대 역사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아무리 논해 봐야 말짱 거짓말이고, 헛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