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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신라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16. 04:01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신라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양서 신라전(梁書 新羅傳)

 

  신라(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양나라와는) 서로 1만리쯤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고역을 피하여 마한으로 도망하여 가자, 마한에서는 동쪽 경계의 땅을 분할하여 주고 그들을 살게 하였는데, 그들이 진(秦)나라 사람이므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비슷한데,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고(孤), 도둑을 구(寇),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며, 서로를 부를 때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않다. 
  또한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세워주어 세습하여 이어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가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 흘러 들어와 산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진한은 처음 여섯 나라였는데, 점점 나누어져 열두 나라가 되었는데, 신라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였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필자주 : 오기로 보인다)
  그 땅이 동쪽으로는 대해(大海)까지이고,
  남북으로는 (고)구려·백제와 접했다.

 

♣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는 기록 때문에 논란이 많은데 5백리의 오기일 것이다.

 

  위나라 때는 신로(新盧)라 했고, 송나라 때는 신라(新羅) 또는 사라(斯羅)라고 했는데,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A.D.521)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했는데, 백제를 따라와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필자주 : 오기로 보인다)

 

♣ 시기적으로 법흥왕인데,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의 성씨는 김씨이고, 이름은 원종이라 기록되어 있어 이 기록의 사실여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습속에 왕성을 건모라(健牟羅)라고 부르며, 그 읍이 (건모라의)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邑勒)이라 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개의 탁평과 52개의 읍륵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당하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 비단과 삼베가 생산된다.
  소는 수레를 끌게 하고 말은 탄다.
  남녀의 구별이 있다.
  그 나라의 관명으로는 자분한지(子賁旱支), 제한지(齊旱支), 알한지(謁旱支), 일고지(壹告支), 기패한지(奇貝旱支)가 있다.
  그들은 관을 유자례(遺子禮)라 하며, 저고리를 위해(尉解), 바지를 가반(柯半), 신발을 세(洗)라 한다.
  그들의 절하는 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그어 신표로 삼는다.
  언어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통할 수 있다.


 

수서 신라전(隋書 新羅傳)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漢)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斯羅)라고도 부른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 왕이) 옥저로 도망갔다.
  뒤에 그들이 고국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나라는 중국·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는데,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스스로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는 기록과 고구려의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건국했다는 기록 그리고 신라의 왕이 본래 백제 사람이었다는 기록 때문에 논란이 많다.

 

  왕위가 김진평에 이르른 개황 14년(A.D.594)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방 특산물을 바치니, 고조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그의 선대는 백제에 부용되었었는데, 뒤에 백제의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 지어 신라로 귀화하여 (신라가) 마침내 강성해졌다.
  이에 백제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으로 삼았다.
  그 나라의 관직은 17등급이 있다.
  1등급은 이벌간(伊罰干)이라 하는데 존귀하기가 상국과 같고, 다음은 이척간(伊尺干)·영간(迎干)·파미간(破彌干)·대아척간(大阿尺干)·아척간(阿尺干)·을길간(乙吉干)·사돌간(沙 干)·급복간(及伏干)·대나마간(大奈摩干)·나마(奈摩)·대사(大舍)·소사(小舍)·길토(吉土)·대오(大烏)·소오(小烏)·조위(造位) 순이다.
  지방에는 군과 현이 있다.
  문자와 갑병(甲兵)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남자는 모두 뽑아 군대에 편입시켜 봉수(烽燧)·변술(邊戌)·순라(巡邏)로 삼았으며, 둔영마다 부오가 조직되어 있다.
  풍속, 형정, 의복은 대략 고구려, 백제와 같다.
  매년 정월 원단에 서로 하례 하는데, 왕은 연회를 베풀어 여러 관원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날에는 일신과 월신에게 절을 한다.
  8월 15일에는 풍악을 울리며 관인들로 하여금 활쏘기 시합을 시켜 상품으로서 말과 베를 준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여러 관원을 모아 자세히 논의한 다음 결정한다.
  복색은 흰색을 숭상한다.
  부인들은 변발( 髮)하여 머리위로 틀러 올려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장식한다.
  혼인의식에는 술과 음식뿐인데, 잘 차리고 못 차리는 것은 빈부에 따라 다르다.
  신혼 첫날밤 신부는 먼저 시부모에게 절을 올린 후 신랑에게 절한다.
  사람이 죽으면 검습( 襲)을 한 후 관에 넣고, 시신을 땅에 묻고는 봉분을 만든다.
  왕과 부모·처자의 상에는 1년 간 상복을 입는다.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 곡식과 밭곡식을 모두 심을 수 있다.
  오곡, 과일, 채소, 새, 짐승 등 산물은 대략 중국과 같다.
  대업(A.D.605∼616) 이래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신라는 지형 상 산이 많고 험준하였으므로 백제와 사이가 나빴지만 백제가 그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북사 신라전(北史 新羅傳)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에 산다.
  진한(辰韓)을 또는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고역을 피해 사람들이 그곳으로 오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분할하여 주어 그들을 살게 하였는데, 그들이 진나라 사람이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말과 비슷한데,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 도둑을 구(寇),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며, 서로를 부를 때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않다.
  또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세워주어 세습하여 대대로 전하지만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들이기 때문에 항상 마한의 통제를 받았다.
  진한은 처음 여섯 나라였다가 점점 나뉘어져 열두 나라가 되었는데, 신라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였다.
  혹은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옥저로 쫓겨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남아있던 사람들이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사로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 고(구)려,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스스로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처음에는 백제에 부용 되었었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자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가 마침내 강성해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으로 삼았다.

  왕위가 대대로 전해져 30세인 진평에 이르른 수나라 개황 14년(A.D.594)에 사신을 보내 지방 특산물을 바치니, 문제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했다.
  그 나라의 관직은 17등급이 있다.
  1등급은 이벌간(伊罰干)이라 하는데 존귀하기가 상국과 같고, 다음은 이척간(伊尺干)·영간(迎干)·파미간(破彌干)·대아척간(大阿尺干)·아척간(阿尺干)·을길간(乙吉干)·사돌간(沙 干)·급복간(及伏干)·대나마간(大奈摩干)·나마(奈摩)·대사(大舍)·소사(小舍)·길토(吉土)·대오(大烏)·소오(小烏)·조위(造位) 순이다.
  지방에는 군과 현이 있다.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남자는 모두 뽑아 군대에 편입시켜 봉수(烽燧)·변술(邊戌)·순라(巡邏)로 삼았으며, 둔영마다 부오가 조직되어 있다.
  풍속, 형정, 의복은 대략 고(구)려·백제와 같다.
  매달 초하루 날에는 서로 하례 하는데, 왕은 연회를 베풀어 여러 관원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날에는 일신과 월신에게 절한다.
  8월 15일에는 풍악을 울리고 관인들로 하여금 활쏘기 시합을 하게 하여 상품으로  말과 베를 준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여러 관원을 모아 자세히 논의한 다음 결정한다.
  복색은 흰색을 숭상한다.
  부인들은 변발( 髮)하여 머리위로 틀어 올려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장식한다.
  혼인의식에는 술과 음식뿐인데, 잘 차리고 못 차리는 것은 빈부에 따라 다르다.
  신혼 첫날밤 신부는 먼저 시부모에게 절을 올리고 큰형과 신랑에게 절한다.
  사람이 죽으면 검습( 襲)을 한 후 관에 넣고 시신을 땅에 묻고는 봉분을 만든다.
  왕과 부모·처자의 상에는 1년 간 상복을 입는다.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 곡식과 밭곡식을 모두 심을 수 있다.
  오곡, 과일, 채소, 새, 짐승 등 산물은 거의 중국과 같다.
  대업(A.D.605∼616) 이래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신라는 지형 상 산이 많고 험준하였으므로 백제와 사이가 나빴지만 백제가 그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구당서 신라국전(舊唐書 新羅國傳)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 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大海)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했다.
  동서 1천리, 남북 2천리이다.

 

♣ 신라가 진한이 아닌 변한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어 논란이 많다.


  성읍과 촌락이 있다.
  왕이 사는 곳을 금성(金城)이라 하는데, 둘레가 7∼8리이다.
  위병은 3천명으로 사자대(獅子隊)를 설치하였다.
  문무관은 모두 17등급이 있다.
  그 나라의 왕 김진평은 수나라 문제 때에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의 작위를 제수 받았다.
  무덕 4년(A.D.621)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고조가 친히 노고를 치하하고 통직산기시랑 유문소를 사신으로 보내 새서 및 그림병풍과 채색비단 3백단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풍속, 형법, 의복은 고(구)려, 백제와 대략 같으나, 조복은 흰색을 숭상한다.
  산신에게 제사지내기를 좋아한다.
  식기는 버드나무 그릇을 쓰는데, 구리그릇과 질그릇도 있다.
  나라 사람들은 김씨, 박씨의 두 성씨가 많은데, 다른 성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
  원일(元日 :元旦 설날)을 중히 여겨 서로 경하하고 연회를 베푸는데, 해마다 이날에는 일신과 월신에게 절을 한다.
  또 8월15일(추석)을 중히 여겨 풍악을 울리고 연회를 베풀며, 여러 신하들을 모아 궁정에서 활쏘기 시합을 한다.
  부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려서 비단과 구슬로 장식하는데 머리털이 매우 길고 아름답다.  
  고조는 이미 해동 삼국이 오래 전부터 원한이 맺혀 서로 번갈아 가며 침공한다는 것을 듣고, 그들이 같은 번국으로서 힘쓸 것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 하고, 그 사신에게 원한을 맺게된 이유를 물으니, 사신이 말하기를
  "지난날 백제가 고구려를 치러갈 때에 신라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신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국을 쳐부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원수가 되어 항상 서로 공격하고 정벌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 신라가 백제의 왕을 잡아 죽였으므로 원한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깊어졌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무덕 7년(A.D.624) 사신을 보내어 김진평을 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에 책봉하였다.
  정관 5년(A.D.631) 사신을 보내 여자 악공 두 사람을 바쳤는데, 모두 머리털이 까만 미인이었다. 태종이 시신에게 말하기를
  "짐이 들으니 소리와 여색(聲色)을 즐기는 것은 덕을 좋아함만 못하다고 한다.
  멀리 산천으로 가로막혀 있으니 고향을 그리워할 것도 가히 알 수 있다.
  얼마 전 임읍에서 바친 앵무새도 고향을 그리워할 줄 알아 제 나라로 보내달라 하였다. 한낱 새도 그러하거늘 사람이야 오죽 하겠는가?
  짐은 그들이 멀리 떠나와서 반드시 친척을 그리워할 것을 불쌍히 여긴다.
  마땅히 사신 편에 딸려 보내 제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해에 진평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그의 딸 선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종실로서 대신인 을제가 국정을 총괄하여 맡아보았다.
  조서를 내려 진평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부의물 2백단을 내려주었다.
  정관 9년(A.D.635) 사신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가서 선덕을 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에 봉했다.
  정관 17년(A.D.643)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가 누차 번갈아 공격하고 습격하여 수십 성을 잃었는데, 두 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신의 사직을 없애려합니다.
  삼가 배신을 보내 대국의 명령을 바라오니 약간의 군사로서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므로,
  태종은 상리현장을 보내 고(구)려에게 "신라는 나의 명령에 따르는 나라로서 조공 바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대 나라와 백제는 마땅히 함께 무기를 거두어들여야 할 것이다.
  만약 공격을 한다면 내년에 군사를 내어 그대의 나라를 칠 것이다" 라는 새서를 내렸다.
  태종은 친히 고구려를 치려고 신라에 조서를 내려 군사와 말을 모집하여 대군에 응접하라 하였다.
  신라는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로 들어가 수구성을 쳐서 항복받았다.
  정관 21년(A.D.647) 선덕이 죽었다. 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나머지 관작은 이전에 봉 한 대로하였다.
  이어 그의 여동생 진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주국을 더하고 낙랑군왕에 봉했다. 
  정관 22년(A.D.648)진덕이 그의 아우 국상 이찬간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보내와 내조하였다.
  조서를 내려 춘추에게는 특진을 제수하고 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을 제수하였다.
  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존 및 강론하는 의식을 구경하겠다고 청하므로, 태종이 친히 지은 온탕, 진사비 및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렸다.
  본국으로 돌아갈 무렵에 3품이상의 관원을 시켜 전별연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하였다.
  영휘 원년(A.D.650) 진덕이 백제의 무리를 대파한 뒤 그의 아우 법민을 보내 보고 하였다. 이때 진덕이 5언의 태평송을 지어 비단에 짜서 올렸다.
  고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을 배수하였다.
  영휘 3년(A.D. 652) 진덕이 죽자 고종이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조서를 내려 춘추(태종무열왕)로서 (진덕의) 뒤를 이어 신라왕을 삼아서 개부의동삼사를 더하여 제수하고 낙랑군왕에 봉했다.
  영휘 6년(A.D.655)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공하여 30여성을 함락시켰다.
  춘추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구원을 청하였다.
  현경 5년(A.D.660)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웅진도대총관에 임명하여 수군과 육군 10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하여 정방과 함께 백제를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니 그 나라 왕 부여의자를 사로잡아 궐 아래에 바쳤다.
  이로부터 신라가 점점 고(구)려, 백제의 땅을 차지하게 되니 그 땅이 더욱 넓어져 서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용삭 원년(A.D.661)에 춘추가 죽으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태부경 법민(문무왕)으로 뒤를 잇게 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삼았다.
  용삭 3년(A.D.663)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고,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을 제수하였다. 
  개요 원년(A.D.681)에 법민이 죽으니 그의 아들 정명(신문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수공 2년(A.D.686) 정명이 사신을 보내와 내조하여 표문을 올려 당나라의 예절에 관한 책 1부와 기타 문장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측천무후는 해당 관사에 명하여 길흉요례와 문관사림 가운데 규범이 될만한 것을 골라 쓰게 하여 모두 5십여 권의 책을 만들어 내려주었다.
  천수 3년(A.D.692) 정명이 죽으니 측천이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의 아들 이홍(효소왕)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작위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을 세습하게 하였다.
  장안 2년(A.D.702)에 이홍이 죽으니 측천이 애도식을 거행하고 이틀동안 조회를 파하였다.
  그의 아우 흥광(성덕왕)을 보내 신라왕으로 삼고, 형의 장군, 도독의 호를 세습하게 하였다.
   흥광은 본명(隆基)이 당 태종(사실은 현종이다)과 같아서 선천(A.D.712) 중에 측천이 고쳐준 이름이다.
  개원 16년(A.D.728) 사신을 보내와 지방 특산물을 바치고, 또 표문을 올려 신라사람들이 중국의 학문과 경교를 배우게 해달라고 요청하니 현종이 윤허하였다. 
  개원 21년(A.D.733)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로 침입하였다.
  이때 흥광의 친척인 김사란이 입조하여 경사에 와 머물러 있으면서 태복원외경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말갈을 토벌하게 하고 이어서 흥광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를 더해주었다.
  개원 25년(A.D.737) 흥광이 죽으니 조서를 내려 태자태보를 추증하고 이어 좌찬선대부 형숙을 홍려소경에 섭직시켜 신라로 보내어 조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승경(효성왕)을 책립하여 아버지의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을 세습하게 하였다.
  형숙이 길을 떠날 적에 현종이 송별시를 지어 그 서문을 쓰고, 태자 이하 모든 관원들로 하여금 시를 지어 전송하게 하였다.
  현종이 형숙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불리우며, 제법 학문을 알아서 중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경의 학문이 강론에 능하기 때문에 이번에 사신으로 선발하여 보내는 것이니 그 나라에 가서 경전을 자세히 알려주어 대국의 유교가 성대함을 알게 하라" 하였다.
  또 그 나라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바둑에 능한 솔부병조 양계응을 형숙의 부사로 삼아 보냈다.
  형숙 등이 그 나라에 이르러 번국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 나라의 바둑 수준은 계응보다 낮았다.
  그리하여 신라에서 형숙 등에게 금은 보화 및 약재 등의 푸짐한 선물을 주어보냈다.
  천보 2년(A.D.743) 승경이 죽으니 조서를 내려 찬선대부 위요를 보내 조제하게 하였다.
  그의 아우 헌영(경덕왕)을 책립하여 신라왕으로 삼고, 아울러 형의 관작을 세습하게 하였다.
  대력 2년(A.D.767) 헌영이 죽으니 국인들이 그의 아들 건운(혜공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대신 김은거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입조하여 지방 특산물을 바치면서 책명을 청하였다.
  대력 3년(A.D.763) 대종은 창부낭중 겸어사중승 사자금어대 귀숭경에게 부절과 책서를 주어 가서 조제하게 하고, 건운을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으로 삼고, 건운의 어머니는 태비로 책봉하였다.
  대력 7년(A.D.772) (신라에서) 사신 김표석을 보내와 하정하니 위위원외소경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대력 8년(A.D.773) 사신을 보내와 입조하고 아울러 금, 은, 우황, 어아수, 조하수 등을 바쳤다.
  대력 9년(A.D.774)에서 대력 12년(A.D.777) 까지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와 입조하였는데, 혹은 한해에 두 번 오기도 했다.
  건중 4년(A.D.783) 건운이 죽었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의 상상(上相) 김양상(37대 선덕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정원 원년(A.D.785) 김양상에게 검교태위 도독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을 제수하였다. 호부낭중 개훈에게 부절과 책명을 주어보냈다.
  그 해에 양상이 죽으니 상상(上相) 경신(원성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그 관작을 세습하게 하였다.
  경신은 전왕(김양상:선덕왕)과 종형제 사이다.
  정원 14년(A.D.798) 경신이 죽었다.
  그 아들이 경신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경신의 맏손자 준옹(소성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정원 16년(A.D.800) 준옹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신라왕을 제수하였다.
  사봉낭중 겸어사중승 위단에게 부절과 책명을 주어 보냈다.
  위단이 운주에 이르렀을 때 준옹이 죽고 그의 아들 중흥(삼국사기에는 청명)이 왕이 되었다는 보고가 있어 위단을 불러 들였다.
  영정 원년(A.D.805) 조서를 내려 병부낭중 원계방에게 부절을 주어 보내 중흥(애장왕)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원화 원년(A.D.806) 11월 숙위로 와 있던 왕자 김헌충(효소왕의 유복자)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이어서 시필서감을 더하였다.
  원화 3년(A.D. 808) 사신 김력기를 보내 내조하였다.
  그 해 7월에 김력기가 말하기를 "정원 16년에 신의 옛 임금 김준옹으로 신라왕을 삼고, 어머니 신씨로 태비를 삼으며, 아내 숙씨로 왕비를 삼는다는 조책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책사 위단이 도중에서 준옹의 죽음을 알고, 그 책명을 도로 가지고 가서 중서성에 두었습니다.
  이번에 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니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엎드려 청합니다"라고 하니, 김준옹(소성왕) 등의 책명은 마땅히 홍려사로 하여금 중서성에서 수령해 오도록 해야 되니 홍려사에 알려서 김력기에게 주어 받들고 돌아가게 하라. 이어 그의 숙부 언승에게 문극을 내려주니 본국은 준례에 따라 내려주라" 하였다.
  원화 4년(A.D.809) 사신 김육진 등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원화 5년(A.D.810) 왕자 김헌장이 와서 조공하였다.
  원화 7년(A.D.812) 중흥이 죽으니 재상 김언승(헌덕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사신 김창남 등을 보내와 슬픔을 알렸다.
  그 해 7월에 언승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지절충영해군사 상주국 신라국왕"을 제수하고 언승의 아내 정씨(貞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의 왕비가 예영각간의 딸 귀승부인이라 했으므로 김씨이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정씨라 했으니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아울러 재상 김숭빈 등 세 사람에게 문극을 내려주고, 역시 본국으로 하여금 준례대로 내려주라고 하였다.  
  직방원외랑 섭어사중승 최정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조제와 책립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인질로 와 있던 김사신을 부사로 딸려 보냈다.
  원화 11년(A.D.816) 11월 입조한 왕자 김사신 등이 태풍을 만나 초주 염성현 까지 표류하여 갔다는 사실을 회남절도사 이용이 알려왔다.
  이해에 신라에 흉년이 들어 무리 1백 70명이 먹을 것을 찾아 절동(浙東)까지 왔다.
  원화 15년(A.D.820) 11월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장경 2년(A.D.822) 12월에 사신 김계필을 보내 조공하였다.
  보력 원년(A.D.825) 왕자 김흔이 와서 내조하였다.
  대화 5년(A.D.831) 김언승이 죽으니 그의 아들 김경휘(흥덕왕)를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지절충영해군사 신라왕으로 삼았다.
  경휘의 어머니 박씨를 태비로 삼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삼았다.
  태자좌유덕 겸 어사중승 원적에게 부절을 주어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 왕을 책립하게 하였다.
  개성 원년(A.D.836) 왕자 김의종이 와서 사은하고 아울러 숙위하였다.
  개성 2년(A.D.837) 4월에 김의종에게 물건을 하사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개성 5년(A.D.840) 4월 홍려사가 신라국에서 국상이 났다는 사실을 알려왔다고 하므로 인질 및 기간이 차서 돌아가야 할 유학생 등 모두 105명을 돌려보냈다.
  회창 원년(A.D.841) 7월에 조칙으로 "신라로 귀국한 관원 중에 전에 선위부사로 있다가 신라에 들어간 전 충연주도독 부사마 사(賜)비어대 김운경을 치주장사에 임명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