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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발해국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17. 05:04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발해국의 중심 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신당서 북적전 발해(新唐書 北狄傳 渤海)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용 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大)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 땅이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이하(泥河)를 국경으로 삼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거란까지이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구)려의 패잔병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만세 통천(A.D.696)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乞乞仲像)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奧婁河)와의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아 수비했다.

 

☆ 당 측천무후 만세통천 원년(A.D.696)에 거란족인 송막도독(松漠都督) 이진충(李盡忠)과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 손만영(孫萬榮)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영주(營州)를 함락시키고 도독 조문홰(趙文 )를 죽인 사건이다.
   
   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봉하고,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였다.
  걸사비우가 그 명을 받아들이지 않자 무후는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쳐죽였는데, 이때 중상은 이미 죽고 그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는데, 해고는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조영이 고(구)려병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해고를 막으니 해고가 패하고 돌아왔다.
  이때 거란이 돌궐에게 부용되었으므로 왕사의 길이 끊어져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하여 지역이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부르며 돌궐에 사자를 보내 통교하였다.
  땅이 사방 5천리이며, 호구는 10여 만이고, 승병(정규군)은 수만 명이다.
  문자를 제법 안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차지하였다.

 

☆ 이때 변한까지 발해가 차지했다는 기록때문에 논란이 많은데, 사실 발해국이 변한까지는 차지한 적이 없다. 


  중종 때에 시어사 장행급을 보내 초위하니 조영이 아들을 보내 입시하게 하였다.
  예종 선천(A.D.712∼713) 중에 사신을 보내 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에 봉하고,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 홀한주도독을 겸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渤海)로 불렀다.
  현종 개원 7년(A.D.719) 조영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사롭게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아들 무예(武藝)가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쪽의 모든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으며,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하였다.

 

☆ 발해가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곧 발해가 황제국을 자칭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현종이 책명을 내려 왕 및 도독을 세습시켰다.
  얼마 후 흑수말갈의 사자가 입조하므로 현종은 그 땅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았다.
  장사(長史)를 두어 총괄 관리하게 하였다.
  무예가 그의 신하들을 불러 말하기를,
  "흑수가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하게 되었고, 지난번 돌궐에게 토둔을 청할 때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려왔다. 이제 당나라에 벼슬을 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 하면서, 아우 문예 및 외삼촌 임아를 시켜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를 치게 하였다.
  문예는 일찍이 경사(장안)에 인질로 와 있었으므로 사정을 알고 무예에게,
  "흑수가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그를 친다면 이는 당나라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는 대국으로서 군사가 우리보다 1만 배나 되는데, 그들의 원한을 산다면 우리는 곧 망하게 됩니다.
  지난날 고(구)려의 전성 시에 군사 30만으로 당과 맞서 싸운 것은 영웅스럽고 굳세다고 할 수 있지만, 당병이 한번 덮치니 땅을 쓸어낸 듯이 멸망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하여 3분지 1에 지나지 않으니 왕이 그들의 뜻에어긋나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라고 말했으나 무예는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때에 문예가 또 글을 올려 간곡히 간하자  무예는 화를 내며 종형 대일하를 보내어 대신 통솔하게 하고 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문예가 두려워서 사잇길을 통하여 귀순해 오니 현종은 조칙으로 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무예가 사자를 보내어 문예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죽여주기를 청하였다.
  현종은 조서를 내려 그를 안서로 보내라고 하고,(조서상으로만 그렇게 하라 하고 사실은 문예를 경사에 숨겨 두었었다)
  "문예가 곤궁에 처하여 나에게 귀순해 왔으므로 의리상 죽일 수는 없어 이미 궁벽한 곳으로 옮겨 보냈다" 라고 답장을 보내는데, 발해의 사자는 머물러 있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 이도수와 원복을 보내어 뜻을 전하였다.
  무예가 사실을 숨긴 것을 알고 글을 올려,
  "폐하는 천하에 거짓을 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하니 이는 문예를 반드시 죽이라는 것이었다.     
  현종은 이도수와 원복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데 대해 화를 내고 모두 좌천 시키고 임시로 문예를 귀양보내고 회보 하였다.
  10년 뒤에 무예가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파견하여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 현종은 급히 문예를 보내 유주(幽州)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공격하는 한편, 태복경 김사란을 사신으로 신라에 보내 군사를 독촉하여 발해의 남부를 치게 하였으나, 마침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 한길이나 내려 군사들이 과반이나 얼어죽어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 많은 사람들은 이때 발해가 지금의 압록강 북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해 등주를 공격할 때 요동반도에서 발해해협을 건너 산동반도를 공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역사적으로 등주는 두곳이 있었고, 이때 발해가 공격한 등주는 후일 쌍성총관부 부근의 등주를 공격한 것이다.

   
  무예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 자객을 뽑아 동도(낙양)에 들여보내 길에서 저격하게 했으나 문예가 그들을 물리쳐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하남에서 자객들을 붙잡아 모두 죽였다.
  무예가 죽자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하였다.
  아들 흠무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고쳤다.
  현종은 왕 및 도독을 세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흠무는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천보(A.D.742∼755) 말년에 흠무가 도읍을 상경(上京 :상경용천부)으로 옮기니 옛 도읍(중경현덕부)에서 3백리 떨어진 홀한하의 동쪽이다.

 

☆ 홀한하가 어디를 말하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종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29번 조공을 바쳤다.
  보응 원년(A.D.762) (대종이) 조서를 내려 발해를 국가로 인정하여 흠무를 왕으로 삼고, 검교태위로 올려 봉했다.
  대력(A.D.766∼779) 중에 25번 조공하고, 일본의 무녀 11명을 조정에 헌상하였다.
  정원(A.D.785∼804) 중에 동남쪽 동경(東京: 동경용원부)으로 도읍을 옮겼다.
  흠무가 죽으니 사사로이 시호를 문왕(文王)이라 하였다. 
  아들 굉림은 일찍 죽고 족제(族弟) 원의(元義)가 1년 동안 왕위에 올랐으나 의심이 많고 포학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굉림의 아들 화여(華璵)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가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쳤다.
  흠무의 작은 아들 숭린(嵩 )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정력(正歷)으로 고쳤다.
  조서를 내려 우효위대장군을 제수하고 왕을 세습시켰다.
  건중(A.D.780∼783),
  정원(A.D.785∼804) 중에 모두 4번 사신이 왔다.
  숭린이 죽으니 시호를 강왕(康王)이라 하였다.
  아들 원유(元瑜)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덕(永德)으로 고쳤다.
  원유가 죽으니 시호는 정왕(定王)이다.
  동생 언의(言義)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쳤다.
  모든 세습제도를 전과 같이 하였다.
  언의가 죽으니 시호는 희왕(僖王)이다.
  동생 명충(明忠)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태시(太始)로 고쳤다.
  1년만에 죽으니 시호는 간왕(簡王)이다.
  종부 인수(仁秀)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다.
  그의 4대조부 대야발은 대조영의 아우이다.
  인수는 바다 북쪽의 여러 부를 토벌하여 국토를 크게 개척한 공이 있다.
  조서를 내려 검교사공을 제수하고 왕을 세습시켰다.
  원화(A.D.806∼820) 중에 모두 16번 조공을 바쳤고,
  장경(A.D.821∼824) 중에 4번,
  보력(A.D.825∼826) 중에 2번 조공하였다.
  대화 4년(A.D.830)에 인수가 죽으니 시호는 선왕(宣王)이다.
  이들 신덕(新德)은 일찍 죽고, 손자 이진(彛震)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쳤다. 다음해 조서를 내려 작위를 세습시켜 주었다.
  문종의 시대가 끝나기까지 모두 12번 내조하였고,
  회창(A.D.841∼846) 중에 모두 4번을 왔다.
  이진이 죽으니 아우 건황(虔晃)이 왕위에 올랐다. 
  건황이 죽으니, 현석(玄錫)이 왕위에 올랐다.
  함통(A.D.860∼873) 중에 3번 조공을 바쳤다.
  전에 그 나라의 왕이 자주 학생들을 경사의 태학에 보내어 고금의 제도를 배우고 익혀가더니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
  숙신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용천부(龍泉府)이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의 3개주를 다스린다.
  그 남부를 중경(中京)으로 삼으니, 현덕부(顯德府)이며,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의 6개주를 다스린다.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인데, 책성부라고도 한다.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의 4개주를 다스린다.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남해부(南海府)이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의 3개주를 다스린다.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압록부(鴨 府)이며,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豊州), 정주(正州)의 4개주를 다스린다.

  장령부(長嶺府)는 하주(瑕州), 하주(河州)의 2개주를 다스린다.
  부여의 옛 땅에 둔 부여부(扶餘府)에는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는데, 부주(扶州), 선주(仙州)의 2개주를 다스린다.
  막힐부(  府)는 막주( 州), 고주(高州)의 2개주를 다스린다.
  읍루의 옛 땅에 둔 정리부(定理府)는 정주(定州), 반주(潘州)의 2개주를 다스린다.
  안변부(安邊府)는 안주(安州), 경주(瓊州)의 2개주를 다스린다.
  솔빈의 옛 땅에 둔 솔빈부(率賓府)는 화주(華州), 익주(益州), 건주(建州)의 3개주를 다스린다.
  불녈의 옛 땅에 둔 동평부(東平府)는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 州), 흑주(黑州), 비주(比州)의 5개주를 다스린다.
  철리의 옛 땅에 둔 철리부(鐵利府)는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의 6개주를 다스린다.
  월희의 옛 땅에 둔 회원부(懷遠府)는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의 9개주를 다스린다.
  안원부(安遠府)는 영주(寧州), 미주( 州), 모주(慕州), 상주(常州)의 4개주를 다스린다.
  또 영주( 州), 고주(錮州), 속주(涑州)의 3개주로서 독주주(獨奏州)로 삼았다.
  속주는 그곳이 속말강(涑沫江)과 가까운데, 소위 속말수(粟末水)인 듯 하다.
  용원(동경용원부)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길이고,

  남해(남경남해부)는 신라길이다.
  압록(서경압록부)은 조공길이고,

  장령(장령부)은 영주길이며,

  부여(부여부)는 거란길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왕을 가독부(可毒夫) 또는 성왕(聖王) 또는 기하(基下)라 하고, 
  명(命)을 교(敎)라 한다.
  왕의 아버지는 노왕(老王), 어머니는 태비(太妃), 아내는 귀비(貴妃), 장자는 부왕(副王), 기타의 아들은 왕자(王子)라 한다.
  관제에는 선조성(宣詔省)이 있는데, 좌상, 좌평장사, 시중, 좌상시, 간의가 소속되어 있다.
  중대성에는 우상, 우평장사, 내사, 조고사인(詔誥舍人)이 소속되어 있다.
  정당서예는 대내상 1명이 좌·우상의 위에 두어져 있고, 좌·우사정 각 1명이 좌·우평장사의 아래에 배치되어 있는데, 복야(僕射)와 비슷하다.
  좌·우윤(允)은 이승(二丞)과 비슷하다.
  좌 6사에는 충부, 인부, 의부에 각1명의 경이 사정의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지사인 작부, 창부, 선부에는 부마다 낭중과 원외가 있다.
  우 6사에는 지부, 예부, 신부와 지사인 계부, 계부, 수부가 있는데, 경과 랑은 좌에 준한다.
  6관과 비슷하다.
  중정대에는 대중정 1명이 있는데, 어사대부와 비슷하며, 직위는 사정의 아래이며, 소정 1명이 있다.
  또 전중사와 종속사를 두었는데, 사마다 대령이 있다.
  문적원은 감을 두는데, 영, 감 밑에는 소령, 소감이 각각 있다.
  태상시, 사빈사, 대농사에는 사마다 경이 있다.
  사장사, 사선사에는 사마다 영과 승이 있다.
  주자감(胄子監)에는 감장(監長)이 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의 관원이 있다.
  무관으로는 좌맹분, 우맹분, 웅위, 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가 있어 각각 대장군 1명과 장군 1명씩을 둔다.
  대략 이상과 같이 중국의 제도를 기준으로 하여 본받았다.

  품계는 질(秩)로 구분하는데, 3질 이상은 자색 옷에 상아 홀과 금어를 찬다.
  5질 이상은 붉은색 옷에 상아 홀과 은어를 찬다.
  6질과 7질은 약간 붉은 옷을 입고, 나무 홀을 든다.
  8질은 녹색 옷을 입는데, 나무 홀을 든다.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이다.
  과일로는 환도의 오얏과 낙유의 배가 있다.

  이외에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대체적으로 같다.
  유주절도부와 서로 초청하고 방문하였으나 영주, 평주에서 경사까지는 8천리나 되는 먼 거리이므로 그 뒤에도 조공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에서 실전 되었으므로 반부(叛附)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