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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문익점이 목화씨를 정말로 처음 가져왔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22. 02:09

윤여동설 - 문익점이 정말로 목화씨를 처음 가져왔을까? - 최초주장

                                                        

                                                                            

  지금은 잘 볼 수 없는 목화꽃과 목화다래 그리고 하얗게 벌어진 목화송이.
  달빛 비치는 밤에 들판을 하얗게 수놓던 약간은 낭만적이기도 한 목화.
  화학섬유에 밀려 지금은 목화를 재배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솜이불을 덮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몇 십년 전만 해도 시골에 가면 목화를 심는 집들이 꽤나 많았고, 이불은 거의 이 목화 솜으로 만들어 덮고 추운 겨울을 넘겼다.   
  특히 시집 보낼 딸을 둔 집에서는 반드시 목화를 심어 그 목화 솜으로 비단 원앙금침을 만들어 혼수품으로 보내곤 했는데,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동네 개구장이들이 그 목화다래를 따먹다가 목화밭 주인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했다.

 

☆ 목화다래가 익어 벌어지기 전 푸를 때에는 수분도 많고 약간 단맛도 나기 때문에 아이들이 즐겨 따먹었는데, 그렇게 되면 목화 생산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목화밭 주인이 목화다래를 따먹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누구나 고려 말에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올 때 목화씨를 붓깍지 속에 숨겨 가지고 들어왔고, 그때부터 한반도에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목화로 실을 만드는 물레와 천을 짜는 베틀은 정천익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목화다래가 벌어진 모습(하얀 것이 바로 원면)  

 

 

                         목화씨를 제거하는 씨아와 실을 감는 물레

 

 

        베짜고 실을 만들고 있는 아낙들(40-50년 전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솜으로 짠 면직물(백제시대에 이미 목화가 재배 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는 고려사 문익점열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고,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도 문익점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있지만 필자는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일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목화가 들어오기 전인 고조선, 삼한이나 삼국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입고 살았고, 무엇을 덮고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는 항상 흰옷을 입는데, 흰 베로 만든 큰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으며, 외국에 나갈 때는 항상 수놓은 비단 옷과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그 위에 여우, 살쾡이, 원숭이, 알록달록한 담비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으며, 금은으로 치장한 모자를 쓴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미 이때 하얀 목화 실로 짠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이 아닌가 싶고, 비단과 베를 짤 줄 알았으며, 털로 실을 만들어 모직옷감을 짤 수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고,
  고구려전에도 공공모임에는 모두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치장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사람들도 비단을 짤 수 있었으며, 외출복으로 비단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기록은 예, 동옥저 등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후한서 한전을 보면, 마한, 진한, 변한 역시 양잠을 할 줄 알고 비단과 베를 짤 수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이미 옷감을 짜는 기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후대인 삼국시대에는 더욱 발전되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시대 사람들은 여름철에는 베(삼베, 모시 등)로 짠 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목화 실로 짠 면포로 만든 옷, 모직옷 또는 가죽옷을 입었으며, 외출복으로는 비단 옷을 입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A.D.662) 조를 보면,
  "백제 좌평 귀실복신에게 화살 십만척, 실 오백근, 솜 천근, 피륙 천단, 가죽 천장, 종자용벼 삼천석을 주었다" 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이때 왜국에 목화가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의 특산물 중에 현주의 포(布), 옥주의 솜( 綿)이 기록되어 있어, 이때 이미 발해에서도 목화가 대대적으로 재배되고 있었고, 그 목화가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특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고 건국된 나라였고, 발해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발해가 멸망하면서 그 일부가 고려로 귀순해 왔으며, 고려는 후일에 이르러 옛 발해 땅이었던 여진을 정벌하여 그 땅의 일부를 차지하기도 했고, 왜국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렇듯 북쪽의 발해, 남쪽의 왜국 사이에 위치했던 고려 만이 목화가 전래되지 않아 고려 말기의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기 전에 목화재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극히 곤란하다.
  또한 비단을 짜기 위해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을 수 있는 물레가 이미 옛날에 만들어져 있었을 것이고, 포를 짜기 위한 베틀도 아주 먼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었을 것인데,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목화 솜에서 실을 만들어내는 물레와 면포를 짜는 베틀을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렵다 하겠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아주 먼 옛날부터 이미 재래종 목화를 재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서의 기록에는 고려 말에 문익점이 원나라로부터 목화씨를 가져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역사적 상황과 지리적 위치를 감안하고, 발상을 전환하여 새롭게 해석해 본다면,
  고려 말에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옛날부터 고려에서 재배해오고 있던 재래종이 아니라

새로운 다수확 품종의 목화씨를 가져왔던 것이 아닌가 싶고,

  정천익이 고려 말에 물레나 베틀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 역시 옛날부터 사용하던 전통 물레나 베틀을 성능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새로운 형태의 물레나 베틀로 만들었다는 말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즉 이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다가  길가에 아주 큰 목화송이를 매달고 있는 목화를 보았는데, 문익점은 그것이 고려에서 보던 목화보다 월등히 큰 새로운 품종이라 여겨 그 씨를 고려로 가져가서 백성들로 하여금 심게 한다면 현재보다 수확량이 훨씬 많아져 나라에 이롭겠다 싶어 그 신품종의 목화씨를 가져와 퍼뜨려 솜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많이 늘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백성들이 부유하게 되었으며, 고려에 의류혁명을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에 벼슬이 점점 오르게 되었고, 죽은 후에도 그 공을 인정받게 되어 문익점의 이름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문익점은 이미 죽었겠지만 그가 전해 준 목화씨는 조선 초까지도 계속 심어져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기 때문에 후세 조선 태종 때에도 문익점의 공을 인정해 그를 강성군으로 추증했고, 그의 두 아들을 특별히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고 하고, 세종 때 다시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영의정과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의 부민후(富民侯)를 추증 받을 수 있었고, 충선공이란 시호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산의 문태식 교장선생님 혹시 삼우당이 조상 할아버지 되시는 것은 아닙니까?  

  

  미래에는 종자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문익점 같은 앞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때다.  

  문익점은 650여년 전에 이미 우량종자 확보가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해외를 여행할 때 단순히 먹고 마시며, 쇼핑, 관광에만 온 정신을 쏟을 일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좋은 종자가 있으면 문익점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리하면 독자여러분도 후세에 이르러 문익점 같이 역사에 기록되고 추앙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