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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태조대왕을 알면 고구려의 초기 역사가 보인다(1)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14. 00:03

윤여동설 - 태조대왕을 알면 고구려의 초기역사가 보인다(1) - 최초주장

   
  고구려 6대 태조대왕 궁은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재사라는 인물은 유리왕의 어떻게 된 아들이고, 그의 시호를 왜 건국시조에게나 붙일 수 있는 태조왕(太祖王) 혹은 국조왕(國祖王)이라 했는지, 고구려 왕실의 성씨가 원래의 성씨였던 해씨에서 왜 고씨로 바뀌게 되었는지, 후한서나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가 "본래 소노부(연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져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또한 위서 고구려전의 "옛날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을 하였다.
  주몽이 도망친 후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여해라 하였다. 장성하자 주몽이 왕이 된 것을 알고 곧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왔는데, 이름을 여달이라 고치고 국사를 위임하였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위에 올랐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이 왕위에 올랐다.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가 왕위에 올라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대패하고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막래의 자손으로 이어져 후에 궁에 이르렀다" 라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 기록상 6대 태조대왕 궁, 7대 차대왕 수성 그리고 8대 신대왕 백고가 형제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긴 하나 과연 이것이 사실일 수 있는 것인지 등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의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추가 재사의 신분

 

  그렇다면 우선 태조대왕 궁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재사의 신분에 대하여 밝혀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고구려 왕실이 고씨 단일 성씨가 아닌 해씨와 고씨 두 성씨로 이어졌음을 밝힐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 재사(再思)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주몽이 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치다가 모둔곡이라는 곳을 지날 때 만난 세 사람 중의 한 명이 재사(再思)였고, 주몽이 그에게 극(克)씨의 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최초이고, 다음은 태조대왕 원년 조에 "태조대왕(혹은 국조왕이라고도한다)의 이름은 궁이요, 어릴 때의 이름은 어수라고도 했는데,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요, 어머니인 태후는 부여부인이었다"는 기록이 두 번째이고, 다음에는 태조대왕 재위 80년 조에 "처음 모본왕이 죽었을 때에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유리왕의 아들 재사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는데, 재사가 자기는 늙었다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계승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지금 왕이 이미 늙었으나 양위할 뜻이 없으니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한 대목에서 재사가 언급된 것이 세 번째로서 삼국사기에는 더 이상 재사라는 인물에 대하여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 기록 속에서 재사의 신분을 밝혀내야 하는 것인데, 고구려 건국설화 속에서 재사는 당시 22세였다고 하는 주몽과 거의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므로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의 아들이 될 수는 없는 일인데, 다음 기록에서는 재사가 유리왕의 아들로서 고추가라는 신분의 소유자였고, 태조대왕 궁의 아버지이며, 모본왕이 죽은 해인 서기 53년에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주몽이 모둔곡에서 만났던 재사와 태조대왕 궁의 아버지인 재사가 동일인이라면 그는 이때 이미 100세도 넘었을 것인데, 그의 장자인 궁이 겨우 7세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건국설화 속의 재사와 궁의 아버지 재사는 별개의 인물이거나, 동일 인물이라면 건국설화에서 주몽과 재사가 만났다는 기록이 사실은 유리왕 대에 일어났던 일이었다고 해석한다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7년(A.D.18) 조를 보면, 유리왕에게는 늦게 얻은 막내 아들 여진이 있었다. 막내였던 만큼 유리왕은 여진을 무척이나 귀여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 4월에 그 귀염둥이 여진이 비류수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했고, 유리왕은 7월에 이르러 두곡이라는 곳으로 갔고, 10월에 두곡 이궁에서 왕이 죽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이때 유리왕은 귀염둥이 막내아들이 강물에 빠져죽자 매우 상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여진 또래의 아이들만 보면 죽은 여진이 자꾸만 생각났을 것인데, 어느 날 모둔곡이라는 곳을 지나다가 여진 또래의 아이들 세 명을 만났고, 그 중에서 재사라는 고씨 성을 가진 아이를 양자로 삼았던 것이라고 해석하면 모든 상황이 설명되는 것이다.
  이때 유리왕에게는 15세의 무휼(이름은 해주류로서 후일의 대무신왕))이 있었고, 또 그 동생인 해색주(후일의 민중왕)가 있었고, 그 아래가 죽은 막내아들 여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색주는 12-13세 정도였을 것이고, 여진은 10세쯤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유리왕이 죽은 여진 또래의 재사를 양자로 삼았다면 재사 역시 서기 18년에 10세쯤 되었을 것인데, 그의 아들 궁이 왕위에 오른 때가 그로부터 35년 후인 서기 53년이었으므로 이때 재사의 나이는 약 45세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모본왕이 죽었을 때 재사가 신하들이 왕위에 오르라고 하자 자신은 이미 나이 들었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자신은 유리왕의 양자였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사양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재사는 유리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였고, 해씨가 아닌 고씨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엄연한 유리왕의 양자였으므로 그 형인 대무신왕과 민중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도 왕의 형제로서의 위상에 알맞은 칭호가 있었을 것인데, 그를 고추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고추가라는 칭호는 조선시대의 대군과 같은 의미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고구려 초기의 왕위 계승

 

  고구려 초기의 왕위 계승은 약간 혼란스러운 듯 하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하다.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였던 주몽은 기원전 79년 동부여에서 태어나 살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도망쳐 졸본부여로 가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의 부마가 되었고,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써 주몽은 고구려의 건국시조로 거듭났던 것이고,

 

☆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고 천제의 자리에 오른 때는 기원전 232년이고, 그 왕위가 2대 해모수리, 3대 해해사, 4대 해우로로 이어졌는데, 기원전 86년에 졸본부여 동명왕에게 멸망당하게 되고, 이때 해우루왕의 동생인 해부루가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도망쳐 다시 동부여를 건국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몽은 동부여에서 기원전 79년에 태어나게 되었고,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졸본부여로 도망쳐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기원전 37년에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어 역사에 고구려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2대 유리왕은 기원전 58년에 역시 동부여에서 태어나 자라 기원전 19년 어머니인 예씨와 함께 그곳을 도망쳐 주몽을 찾아와 태자로 봉해졌다가 주몽의 왕위를 물려받았고,

 

☆ 유리왕은 그 아버지 주몽이 졸본으로 도망친 해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났는데 동부여의 금와왕은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과 아내인 예씨부인 그리고 새로 태어난 유리를 인질로 잡아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있던 주몽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게 되어, 그의 무덤을 동부여에 조성했던 것이고, 예씨와 유리는 기원전 19년에 이르러서야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올 수 있었다.
 
  3대 대무신왕은 유리왕과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 송씨 사이에서 태어나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원래 그에게는 배다른 두 명의 형이 있었다.
  유리왕의 맏아들은 송양의 큰 딸 송씨 소생으로서 이름은 도절이었는데, 요절했고, 둘째 아들은 유리왕과 화희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해명이었는데, 국내로의 도읍이전을 반대하다가 유리왕의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 유리왕은 왕위에 오른 후 다물후 송양의 큰딸과 혼인하여 도절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고, 다시 화희와 치희라는 두 여인을 계비로 얻어 화희에게서 해명이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도읍 이전에 반대하다가 유리왕의 명령을 받고 죽었고, 유리왕은 다시 송양의 작은 딸을 왕비로 받아들여 대무신왕, 민중왕, 그리고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은 여진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여진이 죽은 후 재사라는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4대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동생인데 형인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대신 왕위에 올랐고,
  5대 모본왕은 그 아버지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가 숙부인 민중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는데, 성질이 포학하여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는데, 만약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이고, 신하 중에 간하는 사람이 있으면 활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로라는 시종이 모본왕을 시해했고, 대신들은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지 않게 되어 주몽의 혈손인 해씨들은 이후 고구려의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
  6대 태조대왕은 유리왕의 양자였던 재사의 아들 궁으로서 5대 모본왕이 정신 이상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두로라는 시종이 자기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그를 죽여 버렸는데, 대신들은 모본왕의 태자인 익을 왕위에 올리지 않고 고추가 재사의 장자인 궁을 왕위에 올리게 된다. 왕위에 오를 때 7세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인 부여부인이 태후가 되어 성장할 때까지 수렴청정을 했다고 한다.
  7대 차대왕은 동복형인 태조대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위 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생년이 무려 24년의 차이가 나므로 형제로 보기 어렵다.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동생의 아들로서 태조대왕의 조카였을 것이다.  

  8대 신대왕 역시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신대왕은 태조대왕과는 42년, 차대왕과는 18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들이 형제일 수는 없어 보인다.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의 손자로 보인다. 

  차대왕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제거한 후 어지류 등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에는 차대왕 수성이 동복형인 태조대왕 궁으로부터 왕위를 선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태조대왕의 동생의 아들 즉 조카가 왕위를 강압적으로 빼앗았을 것이고, 그러자 태조대왕의 손자인 막근과 막덕이 차대왕 수성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오히려 잡혀 죽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때 신대왕 백고도 그 일에 가담했었는지 많은 세월을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살아야만 했는데, 드디어 명림답부가 차대왕 제거에 성공하게 되고, 신하들이 백고를 찾아 추대함으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신대왕 백고가 "태조대왕의 계제(季弟)"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태조대왕 궁은 서기 47년 생이고, 동복아우라는 차대왕 수성은 71년 생이며, 신대왕 백고는 89년 생이므로 태조대왕과 신대왕은 무려 42년의 터울이 있어 그를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이 아니라 막내동생의 손자쯤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