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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1)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18. 02:20

윤여동설 - 백제 · 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1) - 최초주장

 

우리는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이 지금의 서울이라 하고, 미추홀을 인천이라 하며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이 경주라고 하면서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 신라 역사를 해석하려 한다.
  그리하여 비류와 온조가 올랐다는 한산을 서울의 북한산 또는 북악산이라 하고,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을 충남 공주라 하며, 계백장군이 신라군을 막다 전사한 황산이 충남 연산 부근이라 하며,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를 충남 부여라 한다.
  그리하여 웅천을 금강이라 하고, 백강도 부여를 지날 때의 금강이라 하며, 기벌포와 웅진구를 금강 하구 부근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서울 부근에서 백제 위례성의 확실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인천부근에서 미추홀의 확실한 흔적 역시 찾지 못하고 있으며, 경주에서도 신라가 건국된 확실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학자들은 그냥 적당 적당히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 기록 이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하고 있는 셈이다.

 

☆ 학자들은 비류와 온조가 떠나온 졸본성이 지금의 중국 환인 오녀산성이라 하고,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진한 6부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 부근이라 하는데, 이는 기록을 보고 비슷한 장소를 찾아 억지로 비정한 것일 뿐이고, 대동강도 사실 패수가 아니며, 황해도는 대방이 아니며, 한수 역시 지금의 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모두를 잘못 비정하고, 역사 전부를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한반도 삼국의 역사서가 아니라 대륙삼국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해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니 잘 맞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명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백제의 흔적은 공주의 무령왕릉과 부여에서 발굴된 창왕명 석조사리감, 그리고 요즈음에 부여 부소산 건너편에서 출토된 창왕명 사리함이 있어 공주와 부여 부근의 많은 다른 유적들은 백제인이 남긴 흔적들임이 확실할 것이고, 익산 왕궁리는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백제 무광왕의 지모밀지 임이 확실할 것이다.
  경주에서 신라왕릉은 확인되지 않고 있고, 그곳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흔적들은 대개 통일신라 이후의 것들로서 신라가 경주에서 건국되었다는 확실한 물증이 발견된 적이 없고, 지금 서울 부근에서는 백제 초기의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


 

☆ 무광왕은 무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 12대 계왕의 아들로서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하고 서기 365년경 한반도로 건너와 지금의 익산 금마에 반도백제를 세운 인물로서 한반도에 백제의 흔적은 이 시기부터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의 위례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천안의 위례산성에서도 백제의 유물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고, 하남 춘궁동과 광주의 남한산성에서도 백제의 확실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으며, 몽촌토성, 풍납토성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제의 확실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백제가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고 하고 있고, 신라가 경상북도 경주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삼국역사를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잘못 인식하게 된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향 때문이라 판단되는데, 사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목적이 있어 쓰여진 역사지리서이다.
  따라서 그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학자들이 지금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무슨 목적으로 쓰여진 것인지를 모른 채, 그 기록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학자들로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누차에 걸쳐 오류를 바로 잡았다고 하기 때문에 그 기록이 대륙역사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역사왜곡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 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 대륙에서 조선이 건국된 후 한반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자 조선에서는 자신들이 도래인이 아닌 고조선으로부터 삼한, 삼국, 고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만들었는데, 이때 그들은 현(縣)급 이상 대륙의 지명 모두를 한반도의 비슷한 위치에 이치 시킨 후 그 건치 연혁 등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역사는 대륙에서의 역사를 그대로 기록해 버리는 수법을 사용함으로써 새로 정한 한반도의 지명이 아주 먼 옛날부터 한반도에서 전해 내려온 것으로 믿도록 만들었다. 다만 동네 이름까지는 바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시골 동네의 이름이 00골, 00울, 00곡, 00마루, 00말, 00터 등 순 우리말로 부르고 있는 동네 이름은 원래 한반도에서 부르던 동네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모든 문화재를 설명할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세밀히 검토해보면 한반도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 기록들이 많이 눈에 띤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자들은 그것을 단순한 오기정도로 치부해 버렸으나 실제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의 대부분의 기록은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대륙의 기록으로서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장가구시, 당산시, 진황도시, 요녕성 호로도시와 조양시, 내몽골자치구 일부에 관한 기록들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선뜻 수긍하기 어렵겠지만 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대륙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지름길 임을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역시 한반도 삼국의 역사서가 아님을 알지 못하고 지금까지 대륙의 기록을 한반도에 대입시켜 역사를 해석하려 했기 때문에 기록과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이 정확히 일치할 리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대 역사는 정설 없이 논란 만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