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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일생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20. 06:34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일생 - 최초주장

 

 

  고구려 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성은 해씨이고, 기원전 79년 5월 5일 동부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불리지이고, 어머니는 유화이다.

 

☆ 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로서, 증조할아버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해진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실전 되었고, 아버지의 이름은 해불리지이다.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라고 전해졌는데, 하백이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어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몽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어부의 딸이었다.

 

  북부여는 고조선 말기인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에 의해 건국되어, 7년 동안 주변국을 통합한 후 기원전 232년에 이르러 천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왕위가 2대 해모수리왕, 3대 해해사왕, 4대 해우루왕에 이르게 되었는데, 기원전 86년에 졸본부여 동명왕의 침공을 받아 해우루왕이 죽게되고, 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해우루왕의 동생인 해부루는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으로 도망쳐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가 곧 동부여이다.
  그런데 북부여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었던 해진의 후예들은 해부루를 따라 가섭원으로 가지 않고 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불리지라는 북부여 왕족이 압록강가를 지나다가 어부의 딸 유화를 만나 겁탈을 하게 되고 유화는 임신이 된다.
  그러자 유화의 아버지는 시집도 안간 처녀가 임신을 하였다 하여 집에서 내쫓아 버려 유화는 동부여로 가서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때가 기원전 79년 5월 5일이었고, 이가 곧 주몽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건국설화에서 "저는 하백의 딸 유화라고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나와 놀고 있는데, 이때 웬 남자가 나타나 자칭 천제의 자손 해모수라고 하면서 웅심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안으로 끌고 들어가 정을 통하고는 그대로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책망하고 우발수로 귀양보냈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은 바로 유화가 해불리지에게 겁탈 당하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주몽이 자라 동부여 왕궁의 말지기가 되었고,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하여 임신이 되었는데, 기원전 58년 봄에 이르러 주몽이 동부여에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잡히면 죽게되는 상황에 처하자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부여로 도망쳐 가게 된다.
  이때 졸본부여에는 부여무서왕이 왕위에 올라 있었는데,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온 주몽을 불러 만나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자신의 둘째 공주를 주어 아내를 삼게 하는데, 이때 주몽은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리하여 부여무서왕은 이때 주몽이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였음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해 10월에 부여무서왕이 죽으면서 둘째 사위인 주몽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어 주몽은 졸지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 부여무서왕에게는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인 조카 우태가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부마인 주몽에게 우선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왕은 죽으면서 주몽의 다음 왕위는 우태에게 돌려주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우태가 자라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와 혼인을 하였고,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낳고, 얼마 후 우태가 갑자기 죽게되어 소서노는 졸지에 아들 둘 딸린 과부가 되었고, 주몽왕의 왕비인 둘째 공주도 비슷한 시기에 죽게 된다.
  그리하여 주몽왕은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다시 재혼을 하게 되는데, 이때 주몽왕은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왕비가 죽음으로써 왕위를 튼튼하게 만들어줄 실력자가 필요했고, 소서노는 남편인 우태가 죽어 날아간 것으로만 생각했던 왕비가 될 수 있고, 또 주몽이 죽고 난 후 다음 왕위를 자신의 아들로 잇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주몽은 죽은 선왕과 우태에게 다음 왕위를 전하라는 것만을 약속했을 뿐 우태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에게까지 다음 왕위를 물려주라는 약속은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서는 동부여에 인질로 잡혀 있는 자신의 친아들 유리가 도망쳐 오면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가지게 된다.
  생각해보면 졸본부여의 동명왕은 해모수가 세웠던 북부여를 멸망시킨 원수였으므로 당시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던 주몽왕은 북부여를 부활시킬 결심으로 동명왕의 증손자인 비류나 온조에게 졸본부여의 왕위를 물려주려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 주몽이 기원전 58년 봄에 동부여에서 도망쳐 온 후 그 어머니 유화부인과 임신 중에 있던 주몽의 첫 부인 예씨는 동부여에 인질로 잡히게 되었고, 유리가 태어나자 그 역시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던 주몽을 찾아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몽왕의 속마음을 눈치챈 소서노는 기원전 42년에 이르러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을 떠나 진번 땅으로 가버리게 되고,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주몽은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어 버린다.
  북부여 해모수의 후예인 주몽이 동명왕이 세운 졸본부여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또 세월은 흘러 동부여에 인질로 잡혀 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기원전 24년에 죽게 되는데, 이때 동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던 금와왕은 그 시신을 고구려 주몽왕에게 보내주지 않고, 동부여에 장사지내 버리는데 이때 태후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고는 한다. 
  그러나 이는 죽은 시신까지도 인질로 잡고 있겠다는 금와왕의 계략이었다.

 

☆ 유화가 기원전 79년에 주몽을 낳았을 때의 나이를 18세라고 가정하면 유화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96년이라는 말이 되므로 유화부인은 약 74-75세 정도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후인 기원전 19년 여름 4월에 이르러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여 주몽을 찾아오게 되는데, 주몽이 기원전 58년 봄 동부여에서 도망친 후 약 40년이 지난 때였다.
  따라서 주몽의 첫 부인 예씨는 약 20세쯤의 젊은 나이에 주몽과 헤어진 후 40여 년이 지난 후 노파가 되어서야 남편인 주몽왕과 재회했던 것이고, 유리 역시 세상에 태어난 후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주몽왕을 40년 만에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몽왕은 친아들 유리를 태자로 봉하게 되는데, 주몽왕은 이때에 이르러서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 해 9월에 이르러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게 되고, 그 아들 유리왕은 아버지 주몽을 졸본 부근의 용산에 장사지낸다. 

 

☆ 삼국사기에는 주몽왕(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졸본부여의 시조 동명왕과 주몽왕을 혼동한 것이고, 또 삼국사기는 주몽왕이 죽었을 때의 나이가 40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역시 잘못된 것으로서 주몽왕은 기원전 79년에 태어나 기원전19년에 죽었으므로 61세의 나이에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