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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당나라가 신라에게 준 패강이남(패수이남) 땅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31. 20:51

윤여동설 - 당나라가 신라에게 준 패강이남(패수이남) 땅은 한반도 대동강 남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없애고 삼국을 통일했다하여 그 이후 시기를 통일신라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신라가 옛 고구려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하고 패수 이남의 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했기 때문에 삼국통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으므로 달리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신라가 패수 이북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4년(A.D.735) 조의,
"정월 김의충을 당나라에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2월에 부사 김영이 당나라에서 죽으니 광록소경을 추증했다. 의충이 돌아올 때 황제(당 현종)가 조칙으로 패강 남쪽 땅을 (신라에게) 주었다" 라는 기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기록을 보고는 735년에 이르러서야 신라가 옛 패수(패강)인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게 되었을 것으로 역사를 해석한다.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고 생각하고, 패수(패강)를 대동강이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수서, 북사, 신·구당서 등에는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했고, 신당서에는 신라의 서쪽에 백제, 신라의 북쪽에 고구려, 신라의 동쪽에 장인국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중국 사서들의 기록이 잘못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 경주를 중심으로 존재했다는 신라를 어떻게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다고 기록할 수 있으며, 또 신라의 동쪽에 장인국이 위치했다고 기록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 사가들이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를 잘 모른 채 사서를 편찬했기 때문이라 생각했고,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사신들도 수시로 오갔던 당나라와 신라와의 관계를 볼 때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위치를 정확히 모른 채 사서를 엉터리로 편찬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북한 평양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의 역사 인식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 때의 낙랑군은 북한 평양부근이 아니라 만리장성이 있는 그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낙랑군의 치소로도 활용되었던 왕검성은 발해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었다.

 

☆ 일제 강점기에 북한 평양부근에서 점제현신사비가 발견되고, 낙랑봉니가 다량 출토되었다고 하여 북한 평양이 낙랑군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점제현신사비와 낙랑봉니는 북한 평양을 낙랑이라 왜곡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것이라 한다.
 
  수경에는 패수에 대하여,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북한 평양을 지나는 대동강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서해바다로 들어가므로 강물의 흐름이 패수와는 반대로 흐르고 있으니 대동강은 옛 패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수(浿水)란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 것일까?
  사기 조선전의 주에는 괄지지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고, 옛날 조선(고조선)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응소의 말을 인용하여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 했으며, 또 신찬의 말을 인용하여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옛 고조선의 왕검성이 낙랑군의 치소로도 활용되었고, 후일에 이르러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 중국 사서에는 왕검성을 왕험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북사에는 평양성에 대하여, "동서가 6리로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당서에는 "평양성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현 서안)에서 5천리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기록을 종합해 보면, 왕검성이나 평양성은 패수의 동쪽에 위치했고, 왕검성의 남쪽으로 패수가 지나가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필자는 왕검성이었다가 낙랑군의 치소가 되었던 곳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의 피서산장(열하행궁)이라고 했는데, 그 부근을 지나는 큰 강은 지금의 난하이다.

 

☆ 지금 북경 서북쪽 대마군산에서 섬전하가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정남기를 지나고, 다륜을 빙돌아 지나 이름을 난하로 바꾸고, 곽가둔에서 소난하를 합류하고,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승덕시 서쪽 쌍난에서 이손하와 합류하고, 다시 승덕시 남쪽에서 무열하를 합류하고, 계속 흐르면서 노우하, 유하, 폭하를 합류하여 반가구수고로 들어가는데, 고구려에서는 난하 중 이 반가구수고 북쪽을 패수라 불렀고, 백제에서는 그 남쪽을 백강이라 불렀다.
  일부 사람 중에는 이 난하를 요수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려 하는 사람도 있는데, 요수는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의 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난하가 지나고 있으니 왕검성(왕험성)의 서쪽과 남쪽에 패수가 흐른다는 사서의 기록들과 정확히 일치하고 또 왕검성이 패수의 동쪽에 위치한다는 기록과도 일치하며, 수경의 패수에 대한 기록과도 강물의 흐름이 일치한다. 
  따라서 지금의 난하가 바로 그렇게도 찾아 헤맨 우리 역사 비밀의 열쇠 패수(浿水)였던 것이고,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 곧 왕검성이요, 낙랑군의 치소요,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던 것이다.
  신라는 피서산장의 동남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백제는 당산, 진황도 일원에 위치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중국 사서들이 왜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다고 기록했고, 삼국사기에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 낙랑이 있으며,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옛 기록들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북한 평양을 왕검성이요, 낙랑군의 치소요, 고구려의 평양성이라 했고, 경주를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금성)이라 했으며, 백제의 도읍 한성을 서울부근, 웅진을 충남공주, 사비를 부여라 하며 삼국 역사를 해석했으니 지금까지 순 엉터리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 현종이 735년에 신라에게 준 패강(패수) 이남 땅도 한반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난하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전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은 원래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필자주 :  이때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했다는 것은 임둔군 땅은 동예가 차지하고 자립하였고, 진번군에서는 맥국이 자립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하게 되자 처음 옥저에 설치했던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되고 현토군의 남은 옛 관할지는 전한낙랑군에 이관하게 된다. 그러자 전한낙랑군에서는 남은 일곱 개 현을 다스리는 낙랑동부도위를 별도로 설치했다가 서기 30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그 땅을 빼앗기게 되어 낙랑동부도위는 소멸하게 되고, 전한낙랑군은 최리라는 사람이 전한, 신나라,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잠깐동안 그 땅을 차지하고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했다가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하게 되고, 후한의 광무제는 서기 44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 버린 낙랑 땅을 탈환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해 살수이남 땅을 탈환하여 후한낙랑군을 다시 설치하게 되는데, 이 후한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서남쪽인 흥륭현 일원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서기 313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이 후한낙랑군을 쳐서 없앰으로써 우리의 고대 역사 강역에서 낙랑군이 영원히 축출되는 것이다.[필자주 : 그렇지만 중국 세력들은 낙랑군을 보정부근으로 이치시켜 상당기간 존속하게 된다)  
   
 
  앞서 733년 가을 7월에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자 당나라는 신라로 하여금 말갈의 남쪽을 치게 했던 일이 있었다.[필자주 : 이 등주는 신라의 북쪽, 후일의 쌍성총관부 부근에 위치한 등주이지 산동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신라가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 많이 내려 많은 군사만 얼려 죽이고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1년 반 후에 당나라 현종이 패강(패수) 이남 땅을 신라에게 주는 것이다.
  이를 보면 당나라 현종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옛 백제 땅을 신라에게 주어 국교를 친밀히 한 후 발해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삼국사기 성덕왕 조에 서기 736년 겨울 11월 이찬 윤충, 사인, 영술을 보내 평양과 우두 두 주의 지세를 검찰하였다는 기록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때 신라가 평양성인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바로 남쪽 난하까지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게 준 패강 이남 땅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북한의 대동강을 패수로 인식하고, 북한 평양을 낙랑으로 인식하는 한 천년이 지나도 그 땅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우리의 고대 역사강역은 우리의 선조들이 말달리던 역사 강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 인식의 틀을 깨지 못하는지 필자는 매우 안타깝다.      
  하루 빨리 발상을 전환해야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고, 한반도보다도 훨씬 큰 잃어버린 대륙의 옛 강역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