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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의 강동 6주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4. 1. 22:06

윤여동설 - 고려의 강동 6주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993년 고려 성종 12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서 고려를 침공한다. 

  앞서 왕건이 거란에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 죽게 했고, 그 후 다시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국교 맺기를 요청했으나 고려는 아예 상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고려가 거란을 신의 없고 믿을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란이 침공해오자 고려에서는 박양유를 상군사로 삼고, 서희를 중군사로,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서쪽 국경에 주둔하고 거란을 방어하게 하고, 왕 성종도 개경에서 서경으로 왔다가 안북부로 나아가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거란이 봉산군을 쳐서 고려의 선봉군사인 윤서안 등이 사로잡히게 된다.

  성종이 서희에게 명하여 봉산군을 구원하려 하자 소손녕이 말하기를,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국경을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하는 것이다.”하였고, 또 “거란이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라. 지체하지 말라.”하였으며, 또 “80만의 군사가 있다. 만약 강으로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모두 멸할 것이니 군신이 빨리 진영 앞에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감찰사헌 이몽진을 예빈소경으로 직급을 높여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면서 침략한 이유를 물으니,
  “너희 나라가 백성을 잘 돌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내리는 것이다. 만약 화친하려거든 마땅히 빨리 와서 항복하라.” 하였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거란에게 주고 황주부터 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왕이 그 의견을 따르려고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마음껏 쌀을 가져가게 했다.  그런데도 쌀이 남자 왕은 그 쌀이 적의 군량미로 사용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던져버리라고 하자 서희가 그의 부당함을 고하여 그를 중지했는데, 서희가 또 말하기를,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는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에게 점거되었었는데,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와 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으니 지금 거란이 침공해온 것은 이 두 성을 빼앗으려 하는 의도로 보입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는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은 사실은 우리를 협박하는 것입니다. 지금 거란 군사가 강성하다하여 바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그들에게 준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 이북의 땅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이니 만약 저들이 그곳을 또 달라고 한다면 그대로 다 주겠습니까? 싸워본 연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이렇게 고려에서 결정이 늦어져 회답이 없자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했으나 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거란에서는 다시 사람을 고려에 보내 항복을 재촉했다.
  고려에서 합문사 장영을 보내자 거란은 대신급으로 격상시키라고 요구하며 장영을 돌려보내니 고려에서는 마땅한 사람을 물색했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희가 나서서 그가 거란 진영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가서 거란의 소손녕을 만나게 되었는데, 소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중국의 귀인이니 당연히 뜰에서 절을 해야 한다”고 하자 서희가 말하기를 “뜰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절을 할 때만 하는 것이다.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만나는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화를 내고 객사에 돌아와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소손녕이 그제야 서희가 당위에 올라와 예를 행하도록 허락했다.
  이에 서희가 당위에 올라 예를 행하고 동서로 마주 앉아 서로 논변하는데,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고 있다.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이 때문에 와서 죄를 따지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했다.
  그러자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리하여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 이때 고려를 대표한 서희는 스스로 고려가 평양에 도읍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평양에 서경을 두었던 것을 말하는 듯 하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거란의 동경[필자주 : 지금의 북경]이 우리의 지경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하는가? 압록강 안팎은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점거하여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이는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고 성과 보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어찌 조빙하지 않겠는가?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 조빙하겠다.”하자 소손녕은 “고려에서 화친을 청하였으니 마땅히 전쟁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본국에 보고하게 되고 고려는 거란과 국교를 맺음으로써 송나라와는 단교를 하게 된다.
  이때 소손녕은 낙타 열 마리, 말 1백 필, 양 1천 마리 그리고 비단 5백 필을 서희에게 선물로 보내온다.
  소손녕은 서희가 비록 적장이었지만 그의 논리 정연한 말솜씨와 당당함을 흠모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해 2월 소손녕이 다시 글을 보내 왔는데,
  “황제께서 고려와 논의하여 요충 되는 길목에 성과 못을 쌓도록 하라 하셔서 압록강 서쪽에 5개의 성을 쌓으려 합니다. 3월 초에 성을 쌓을 곳에 이르러 수축에 착수하기로 하였으니 대왕께서 미리 먼저 지휘하여 안북부에서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2백80리 사이에 적당한 토지를 물색하여 거리를 참작해 쌓아야 할 성의 수를 회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고, 성종은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장흥진·귀화진·곽주·귀주에 성을 쌓았다.

 

☆ 송사 고려전에는 이때 흥주성 · 철주성 · 통주성 · 용주성 · 귀주성 · 곽주성 등 6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후 고려 현종 원년인 서기 1010년에 이르러 거란은 강조의 목종 시해 사건을 구실 삼아 40만 보·기병으로서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이때 고려가 패전하고 현종은 궁궐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는데, 적성현 단조역을 지나 창화현을 거쳐 양주, 광주(廣州), 천안, 삼례, 장곡을 지나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까지 파천하게 된다.
 

  그 후 고려군이 점점 전열을 가다듬어 거란군을 격파하고 결국 거란군이 물러가자 왕이 환궁을 위하여 전주, 공주, 청주(?)를 거쳐 개경으로 환궁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읽으면서 한반도를 생각하게 되지만 사서의 기록들은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편을 보면,
  “처음에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함께 땅이 개의 이빨같이 맞물려 혹은 서로 화친하고 혹은 서로 침략했는데, 후일에 이르러 당나라와 함께 두 나라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토지를 평정한 후 곧 아홉 개 주를 설치했다. 본국 내에 3개 주를 설치했는데, 왕성 동북쪽 당은포 방면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다.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를 설치했는데, 백제의 옛 성 북쪽 웅진 부근을 웅주(熊州)라 하고, 그 다음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그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 하였다.
  옛 고구려 지역에 3개 주를 설치했는데, 서쪽으로부터 첫 번째를 한주(漢州)라 하고, 한주의 동쪽을 삭주(朔州), 삭주의 동쪽을 명주(溟州)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상식대로 신라의 왕성인 금성이 한반도의 경주에 있었다면 경주의 동북쪽 방향에 당은포가 있어야 하고 그 부근을 상주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셈인데, 지금 경상북도 상주는 경주의 동북쪽 방향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서북쪽 방향인 문경의 남쪽, 김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옛 백제 지역에 설치했다는 웅진 부근을 웅주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의 충남 공주가 웅진이고, 웅주의 서남쪽에 전주를 설치했다면 지금 한반도 충남 공주의 정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전북 전주를 기록 속의 전주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방향이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기록을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로 비정되는 지금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을 기준으로 배치해 보면 옛 기록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고구려 땅이었다는 한주는 반가구수고 동쪽 도산부근에 설치되었던 듯 하고, 그 동쪽의 삭주는 지금의 능원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다. 또 그 동쪽의 명주는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 땅을 나누어 설치했다는 웅주, 전주,무주는 지금의 조백하와 난하 하류 부근지역으로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진주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견훤의 후백제는 한반도의 광주 부근에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난하 하류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삼국사기 열전 견훤 조를 보면,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라 했는데, 우리는 그 가은현이 지금 한반도 경북 문경의 가은면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가 처음 나라를 세웠다는 무진주(武珍州)를 광주(光州)쯤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6년(A.D.982) 조의 완산의 도적 견훤이 주를 점거하고 후백제라고 자칭하니 무주(武州) 동남쪽 군, 현들이 투항하여 견훤에 속했다는 기록 속의 완산을 지금 한반도 전북 전주 부근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 기록이 지금의 북경 동쪽 당산 부근에 관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이 바로 신라와 견훤 그리고 궁예가 각축을 벌였던 곳으로서, 궁예가 나라를 세웠다는 철원은 지금의 진황도 북쪽의 평천 부근 쯤으로 비정할 수 있고, 고려의 개경 역시 그 부근의 승덕시 관성현인 것이다.
  따라서 나주를 지금의 난하 하류 쯤으로 비정할 경우 고려 현종의 파천 경로는 옛 개경이었던 지금의 관성현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나라의 남쪽 끝까지 갔다가 승덕시 관성현으로 되돌아왔다는 말이 된다.
  고려는 그곳에 있었고, 압록강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을 흐르는 백하(밀운수고)였던 것이다.

  따라서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 끝에 확보한 강동 6주는 지금의 압록강 동쪽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경 동북쪽 백하(밀운수고) 동북쪽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