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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홍려정비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4. 23. 22:52

윤여동설 - 홍려정비의 비밀 - 최초공개

 

                                                                              

 

  서기 714년 5월 18일 당나라의 홍려경(鴻려卿) 최흔(崔흔)이 말갈에 사신으로 갔다오다가 요동반도 끝인 여순에 이르러 두 개의 우물을 파고 기념으로 우물 옆 바위에 글을 새겨 놓아 사람들이 그 우물을 홍려정(鴻려井)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비석을 홍려정비(鴻려井碑)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그 비석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지금은 일본왕궁의 정원에 놓여 있다고 하는데, 그 비문의 내용이 발해와 관련이 있어 중국에서 일본에 비석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에서는 묵묵부답이고, 일반에게 공개하지도 않고 있다고 한다.
  비문을 보면,[필자주 : 위 비문은 청 광서 을미년 즉 광서21년인 1895년에 세운 것이다]
  "勅持節宣勞靺羯使 鴻臚卿崔忻 井兩口 永爲記驗 開元二年 五月十八日"이라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이를 해석해 보면, "칙명으로 부절을 가지고 말갈을 선무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신 홍려경 최흔이 우물 두 개를 만들고 이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글을 새긴다. 개원 2년 5월 18일"이라는 뜻인데, 비문 중 개원 2년은 서기 714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 구당서 권199하 열전 제149하 북적발해말갈조를 보면, "睿宗 先天二年(A.D.713) 遣郎將崔訢往冊拜祚榮爲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 仍以其所統爲忽汗州 加授忽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최흔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으로 봉하고, 홀한주도독을 더해주기 위해 말갈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우물을 판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기록대로라면 714년 5월 18일에 최흔이 지금의 요동반도 끝을 지났고, 사람들은 이때 최흔이 발해에 갔다 오면서 여순을 지났을 것으로 역사를 해석한다.
  그러나 필자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다. 그 땅이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니하를 국경으로 삼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거란까지이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구려의 패잔병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만세통천(A.D.696)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와의 사이에 성벽을 쌓아 수비했다.   
  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봉하고,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였는데, 걸사비우가 그 명을 받아들이지 않자 무후는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쳐죽였는데, 이때 중상은 이미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는데, 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을 넘었다.
  조영이 고구려병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해고를 막으니 해고가 패하고 돌아왔다. 이때 거란이 돌궐에게 부용되었으므로 왕사의 길이 끊어져 그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하여 지역이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부르며 돌궐에 사자를 보내 통교하였다.
  땅이 사방 5천리이며 호구는 10여 만이고, 승병은 수만 명이다.
  문자를 제법 안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고조선, 고구려)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차지하였다.

 

☆ 신당서는 왜 변한과 조선(고조선)이 바다 북쪽에 있다고 기록했던 것일까? 이는 변한이나 옛 고조선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했음을 말해주는 기록으로서 실제 이들은 발해 북쪽 지금의 난하 부근에 위치했다. 다만 발해가 변한까지 차지했다는 것은 오기일 것이다.

    
  중종 때에 시어사 장행급을 보내 초위하니 조영이 아들을 보내 입시하게 하였다.
  예종 선천(A.D.712-713) 중에 사신을 보내 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에 봉하고,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로 삼아 홀한주도독을 겸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渤海)"로 불렀다.

  현종 개원 7년(A.D.719)에 조영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사롭게 시호를 고왕이라 하였다.
  아들 무예가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쪽의 모든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으며.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발해의 중심 강역을 길림성으로 보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옛 사서의 기록을 잘못 이해하고 오랜 세월 동안 백두산 동북쪽에서 발해의 건국지 동모산을 찾으려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六頂山)에서 발해의 3대왕이었던 문왕 대흠무의 둘째 딸인 정혜(貞惠)공주의 묘가 1949년에 발굴되었다고 하고, 길림성 화룡 용두산(龍頭山)에서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貞孝)공주 묘가 1980년에 발굴되었다고 하여 그 부근이 발해의 건국지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공주가 성장하여 국가 정책상 주변 제후국으로 시집을 갔고, 그곳에서 죽어 묻혔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인데,
  필자가 밝혀본 바에 의하면 발해의 중경현덕부는 한반도 북쪽 중국 길림성이 아니라 지금의 내몽골 파림우기 부근으로 비정되고, 상경용천부는 파림좌기, 남경남해부는 옹우특기, 동경용원부는 고륜기, 서경압록부는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으로 추정된다.

 

☆ 발해는 5경을 두었는데, 상경용천부, 중경현덕부, 남경남해부, 동경용원부, 서경압록부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당나라의 최흔이 장안(현 서안)을 출발하여 배를 타고 대조영의 발해에 갔다면, 산동반도를 돌아 발해에 진입하여 그를 건너 지금의 요하, 서요하(서랍목륜하)를 타고 올라가 발해의 도읍에 도착할 수 있고,

  또 당나라와 밀접했던 통일신라가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호로도, 하북성 진황도와 당산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최흔이 발해에 간다면 당연히 그 해로를 선택했을 것이고, 돌아갈 때도 그 해로를 되짚어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흔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기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왜 최흔은 요동반도를 지났다고 하고 있는 것일까? 

 

☆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에는 대조영이 성력(A.D.698-699) 중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랐다고 했고,  

  신당서에는 측천무후가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그 아들인 대조영이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발해에 사신을 보내며 비하하는 명칭인 "말갈사(靺鞨使)"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고,  

  또 사신으로 길을 지나면서 한가롭게 샘을 두 개나 파고 바위에 글을 새기는 관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혹시 이때 최흔은 대조영의 발해가 아닌,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에 위치했던 고대의 일본(고대의 왜국)을 찾아가 당나라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일까?  


  사실이 그러하다면 요동반도 여순의 홍려정비는 발해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고대의 일본과 관련이 있는 비석이라는 말이 된다.  

  홍려정비에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일본은 그 비석을 일반에게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곳에 고대 일본이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밝혀주는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 말갈은 옛 숙신이요, 읍루요, 물길이요 후일의 여진인데, 발해국(대진국)은 속말말갈족이 중심부족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파림우기, 파림좌기를 중심으로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대의 왜국은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홍려정비가 진짜라면 홍려정비의 원래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가 아니라 고대의 요동이었던 지금의 북경 부근에 세워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