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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두 왕의 왕비가 된 여인

윤여동 2008. 4. 25. 08:14

윤여동설 - 고구려 두 왕의 왕비가 되어 치맛바람 휘날린 왕비 우씨

 

 

   연나부 우소의 딸인 우씨는 서기 180년 2월에 고구려 9대 고국천왕과 혼인을 하여 왕비가 되었다.

   우씨가 고국천왕의 왕비가 되자 그녀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나라의 권력을 휘어잡고 그 자식들 또한 모두 그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남의 딸들을 납치하여 겁탈하고 항의하면 집과 밭을 빼앗고 죽이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겼다고 한다.
  고국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였더니 좌가려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왕비 우씨의 권세가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고국천왕은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갈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때 발탁한 인재가 바로 그 유명한 "명재상 을파소"이다.
  고국천왕은 일개 농부였던 을파소를 국상(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임명하여 정치를 개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업적과는 별개로 불행히도 고국천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왕비 우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국천왕은 아들이 없이 죽게 된다.

  원래 고국천왕은 다섯 형제중 둘째였다.
  첫째인 발기(拔奇), 둘째인 고국천왕 남무, 셋째인 발기(發 ), 넷째인 산상왕 연우, 다섯째인 계수가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할아버지인 신대왕이 둘째 손자가 똑똑하여 왕위를 이을 재목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태손으로 정하여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후손이 없이 죽고 말았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신대왕 백고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신대왕의 아들은 일찍 죽었고 손자들이었다.


  고국천왕이 후사가 없이 죽게되자 왕비 우씨는 왕이 죽은 것을 일단 비밀에 붙이고, 셋째인 발기를 찾아가  "왕에게 후사가 없으니 아주버니께서 왕의 뒤를 이어야 하겠습니다" 라고 밑도 끝도 없이 말을 하니 왕이 죽은 것을 알 리가 없는 발기는  "하늘의 운수는 돌아갈 데가 있는 것이고 왕이 아직 젊으신데 벌써 후사에 관한 것을 논의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처사로 생각됩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잘못하면 역모로 다스려질 수도 있는 위험한 말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부녀자가 한밤중에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부녀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으니 어서 돌아가세요"라고 핀잔을 하였다.
  발기는 사리판단이 정확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라서 형수인 우씨에게도 거침없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분이 나빠진 왕후 우씨는 그 길로 넷째인 연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연우는 의관을 정제하고 대문으로 나와 형수이며 왕비인 우씨를 정중하게 맞아들이고 음식을 준비하여 정성껏 대접하였다.
  음식을 먹고 나서 왕후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조금 전 대왕이 승하하셨소. 그러나 내가 박복하여 아들을 낳지 못해 후사를 이을 태자가 없소.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요. 순서로만 따진다면 셋째인 발기가 응당 왕위를 이어야 하겠으나, 그는 나에게 딴 마음이 있는가 생각하고는 난폭하고 오만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므로 아주버니와 상의하러 온 것이요"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연우는 예의를 더욱 극진히 하고는 오늘밤은 이미 늦었으니 그만 궁중으로 돌아 가셨다가 날이 밝으면 대신들과 의논하여 후사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왕비가 궁궐로 돌아갈 때,
  "밤이 깊어 무슨 변이 있을지 모르니 아주버니께서 나를 좀 대궐까지 바래다주시오"하였다.
   연우도 이 비상 시국에 무슨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왕비를 호위하여 대궐 앞까지 와서는 그만 들어가시라고 하고는 돌아서려 하였다.
  그러자 왕비 우씨가 연우의 손을 잡고는,
  "대궐에 초상이 났으니 혼자 있기가 두렵습니다. 같이 들어가 향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상의합시다."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대궐로 들어가게 된다.

  이튿날 날이 밝자 왕비 우씨가 대신들을 모아 놓고,

  "왕이 어젯밤에 붕어하셨습니다. 왕께서 넷째인 연우로 하여금 왕위를 있도록 하라는 유명을 남기셨습니다"라고 발표한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도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연우를 왕으로 옹립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셋째인 발기는 펄쩍 뛰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그 만은 왕비가 발표한 왕의 유명이라고 한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발기는 군사를 동원하여 궁성을 포위했으나  연우는 궁궐 문을 꼭 닫고 지켰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 밖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발기의 반란군을 치도록 명령했다.
  발기는 대궐 밖에서 소리쳤다.
  "왕위를 훔쳐간 도둑놈아. 그 왕위는 내가 올라야 한다. 동생이 어찌 형의 왕위를 가로채 왕위에 오를 수 있단 말이냐?
  당장 나와 무릎꿇어라. 만약 안나오면 여기 있는 너의 처자를 모두 죽여 버리겠다." 하였으나 대궐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발기는 연우의 가족들을 죽여버리고 대궐을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뒤에서 관군이 그들을 공격하여 발기는 싸움에서 패하고, 자기를 따르는 무리 3만을 이끌고 요동태수에게로 가서 투항했다.

 

이때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지금의 요동은 옛 요동이 아니다.


  그리고는 요동태수에게 말하기를
  "내가 올라야할 왕위를 나의 동생인 연우가 형수인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랐소. 나에게 군사 3만을 빌려준다면 그들을 쳐 없애고 왕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요."
  요동태수도 그 말을 믿고 군사 3만을 빌려주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고구려 군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막내인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발기가 이끌고 온 한나라 군을 막게 했다.
  형제간의 싸움에서 발기가 이끄는 한나라 군은 패배하고 발기는 막내 동생인 계수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거의 잡히게 되었다.
  발기는 동생 계수에게 "네가 지금 이 늙은 형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연우가 왕위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비록 대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형으로서 한때의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구려를 멸하려고 하다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죽은 뒤에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뵈오려 하십니까?"
  발기는 계수의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
  그리하여 배천까지 도망하여 그곳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계수는 비록 발기가 반란을 도모한 역적이었으나 형이었으므로 울면서 그의 시체를 거두어 풀을 베어 덮어놓고 돌아와 전과를 왕에게 보고하며, 발기가 자기의 행동을 뉘우치고 스스로 자결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 후 왕도 발기를 용서하고 그의 시체를 거두어 왕의 예로써 장사 지내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산상왕 연우는 형수였던 우씨를 그대로 왕후로 삼았다.

 

☆ 고구려 역사상 죽은 형의 부인이었던 형수와 시동생이 혼인한 예는 이것이 유일한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으로는 생각되나 아주 떳떳한 일은 아니었던 듯 하다.
 
  고국천왕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던 왕비 우씨는 산상왕과의 사이에서도 역시 아들이 없었다.
  원래 산상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발기의 반란 때 그 가족이 모두 반란군에게 잡혀죽었고, 재혼한 왕비 우씨와의 사이에서도 아들이 없었으므로 지금 산상왕에게는 자식이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산상왕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기도하게 된다. 
  그랬더니 보름날 밤 꿈에 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국상 을파소가 말하기를 "천명이란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왕께서는 기다리십시오"하였다.
  그리하여 산상왕은 기다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후,
  교제(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그리하여 제물을 관리하는 자가 돼지를 쫓아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으나 돼지가 날뛰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때 20세 가량의 한 아리따운 처녀가 나타나더니 웃으면서 돼지의 앞으로 와서 잡아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후녀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기어 그 여자를 보고 싶어서 밤에 후녀의 집까지 미행하였다.
  시종 하는 사람을 시켜 설명하니 그 집에서 왕이 온 줄을 알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이 방으로 들어가서 후녀를 불러 동침하려 하였다.
  그러자 후녀가 말하기를 "대왕의 명령을 감히 거스를 수 없사오나 만약 아들을 임신하게 되거든 못 본 척 하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하니 왕이 이 말을 승낙하였다. 한밤중이 되자 왕이 일어나서 환궁하였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봄 3월에 이르러 왕비 우씨가 왕이 지난 겨울에 주통촌에 사는 후녀에게 갔던 것을 알고, 질투하여 가만히 군사를 보내어 후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후녀가 이 소문을 듣고 남장차림으로 변복하고 도망하였으나, 병사들이 후녀를 추격하여 잡아 죽이려하자 그 여자가 묻기를,
  "너희들이 지금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이 왕이 명령이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나의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이는 실로 왕의 혈육이다. 내 몸을 죽이는 것은 괜찮지만 왕자까지 죽이겠느냐?" 하였다.
  병사들이 후녀를 감히 죽이지 못하고 돌아와서 그녀가 말 한대로 보고하니 왕비가 화를 내어 기어이 죽이려 하였으나 이때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중지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다시 그 여자의 집에 가서 묻기를,
  "네가 지금 임신한 것이 누구의 아이냐?' 하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평생에 형제사이에도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성이 다른 남자를 가까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진실로 대왕의 혈육입니다." 하였다.
  왕이 그 여자에게 매우 후하게 선물을 주어 위로하고 대궐로 돌아와서 왕후 우씨를 타이르니 왕후도 결국 그 여자를 죽이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가을에 이르러 주통촌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왕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주신 나의 뒤를 이을 아들이로다." 하였다.
  처음에 교제에 쓸 돼지가 도망한 일로 인하여 그 아이의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하여 그 아이 이름을 교체(郊 )라 하고 아이 어머니를 소후(小后)를 삼았다. 

  앞서 소후의 어머니가 임신 중에 있을 때 무당이 점을 쳐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다." 라고 하여 그 어머니가 기뻐하였는데, 그 후 정말로 딸을 낳게 되자 후녀(后女)라고 이름지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후녀가 살던 곳이 주통촌(酒桶村)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후녀의 아버지는 술통을 만드는 목수가 아니었나 싶고, 후녀가 낳은 아들은 산상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 11대 동천왕 교체이다. 
  동천왕의 생모인 후녀는 일찍 죽었던 것으로 보이고, 왕비 우씨는 동천왕이 왕위에 오르자 태후로 봉하여졌다가 서기 234년 9월에 약 75세로 죽었다.
  그런데 우씨가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내가 행실을 바로 하지 못하였으니 지하에 계신 고국천왕을 무슨 면목으로 만나겠는가? 나를 산상왕의 능 옆에 묻어달라" 하였으므로 유언에 따라 산상왕의 능 옆에 장사 지냈다.
  그런데 유언에 따라 왕비 우씨를 산상왕의 능 옆에 장사지내고 나자 무당이 말하기를 , 

고국천왕의 영혼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억누를 길이 없어 우씨와 대판 싸웠다. 백성들 보기가 창피스럽다. 네가 조정에 말하여 나의 무덤을 무엇으로든지 가리우게 해달라"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동천왕은 고국천왕의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 주었다.
  이를 보면 시동생이 형수와 혼인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혼인관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왕후 우씨는 질투심도 많고, 여걸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아이를 낳지 못하여 그 후손으로 왕위를 이을 수는 없었다. 우씨는 형과 아우, 고구려 두 왕의 왕비가 되어 한평생 치맛바람 휘날리며 살다간 대단한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