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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우륵은 한반도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했을까?

윤여동 2007. 10. 19. 08:01

윤여동설 - 우륵은 한반도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했을까?

 

 

 

 

  삼국사기 진흥왕 12년(A.D.551) 3월 조를 보면,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에 도착했는데,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에 머물러 그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지어 불러 주었다.
  이에 앞서 가야국 가실왕이 12현금을 만들어 그 모양은 열두 달을 상징하고 우륵을 시켜 그 곡조를 짓도록 하였는데, 그 나라가 망하니 악기를 가지고 우리나라로 귀순해 와서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진흥왕 13년(A.D.552)  조에도,
  "왕이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다. 우륵이 그 사람들의 재능을 참작하여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쳐 배움이 끝나자 왕이 그들을 시켜 연주를 하게 하고 말하기를 '전일 낭성서 듣던 음악과 다름이 없도다' 하고 후하게 상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충북 충주에 가면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 탄금대(彈琴臺)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있고, 그곳이 바로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고 하고, 후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그곳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막으려했으나 전투에서 패하고 죽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신라의 천년 도읍 금성이 경북 경주라고 생각하고,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북한의 평양이라 생각하며, 백제의 도읍 사비를 충남 부여라고 생각한다.
  또한 경상남도 일원이 가야지역이었다고 생각해 그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가야유물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법흥왕 19년(A.D.532)에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해 온 것도 김해부근의 금관가야가 경주에 도읍하고 있던 신라에 투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진흥왕 16년(A.D.555)조의 "겨울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 정했다"는 기록을 보고는 이때 신라가 지금 서울의 북한산까지를 차지하게 되어 인천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국과의 해상교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그리고는 북한산진흥왕순수비가 이때 진흥왕이 북한산을 직접 순수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라 한다.
  그러다보니 551년경에는 충북 충주 부근을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가야국의 우륵이 신라로 망명해 온 후 충주 탄금대에서 살고 있었는데, 진흥왕이 그곳을 지나다가 우륵의 가야금 연주를 듣게되었고, 다음해에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을 우륵에게 보내 그 음악을 전수 받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침 그곳에서 고구려 문자왕 때인 서기 495년에 세운 중원고구려비도 발견되어 그곳이 삼국의 접경지역이었다가 진흥왕 때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충주가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진흥왕이 소경을 설치했고,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개칭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 믿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이제야 밝히게 되었으니 너무 늦은 감이 든다.
  이는 기본적으로 삼국과 가야의 위치를 잘못 비정한 결과로서 신라는 원래 한반도의 경주부근에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호로도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가야는 그 서남쪽 흥성 부근에서 건국되었다.
  따라서 가야 건국 설화에서 구지봉이라고 하는 곳은 지금의 흥성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백제는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는 그 북쪽 하북성 승덕시와 장가구시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때 백제와 신라는 지금의 산해관 정도를 국경으로 했을 것이다.
  따라서 진흥왕이 우륵과 만난 탄금대는 한반도의 충주가 아니라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 난하는 옛 패수(浿水)와 백강이었다. 
  고구려에서는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북쪽을 패수라 불렀고, 백제에서는 그 남쪽을 백강이라 불렀는데,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은 바로 진황도 도산 남쪽이었다.    
  그런데 지금 충북 충주 탄금대는 한반도의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진흥왕이 설치했던 국원소경은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천마호 북쪽 태영 부근으로 비정되고 탄금대는 지금의 천마호가에 위치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곳 태영이 신라의 국원소경이요, 후일의 중원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탄금대는 그곳의 견문산에 창벽이 20여장이나 되는 높은 절벽이 있고,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으로서 후세 사람들이 그 지명을 탄금대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견문산(犬門山)은 주의 서쪽 8리에 있는데, 그 아래 큰 냇물을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충주의 서쪽 8리에 있었다는 견문산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천마호 북쪽에 위치한 산일 것이고, 탄금대 아래 대천(큰 냇물)이란 지금의 천마호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며 살았다는 원래의 탄금대는 지금 중국 하북성 진황도의 천마호 변에 있는 것이지 한반도 충주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충주의 탄금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옛 기록을 한반도에 적용해 비슷한 위치를 찾아 그곳을 탄금대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