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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윤여동 2008. 5. 19. 01:08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우리는 지금 고구려가 28명의 왕들이 왕위를 이었던 것은 알고 있으나 확실한 고구려 왕릉은 한곳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평양의 고구려 왕릉을 추모왕릉(주몽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 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집안의 태왕릉을 광개토왕릉, 장군총을 장수왕릉이라 하고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보장왕의 능은 당나라 장안에 조성했다고 했으므로 실제 고구려 강역 내에는 27명의 왕릉만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요녕성 환인을 졸본이라 했고, 길림성 집안을 국내성이라 했으며, 북한 평양을 평양성, 황성, 장안성이라 함으로써 고구려의 왕릉들을 이곳에서 찾으려했으나, 그곳에 도읍했던 당시 왕들의 능을 찾아낼 수가 없었는데, 필자는 그 이유를 우리가 지금까지 전혀 엉뚱한 곳에서 고구려 왕릉들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실제 고구려왕릉들은 어디에 조성했던 것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에 의한 고구려 역대 왕릉들의 조성위치는,

 

  시조 추모왕(주몽왕)의 능은 용산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졸본(홀본)이었다. 

  그리고 호태왕비문에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용산이라는 곳이 졸본(홀본)의 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추모왕의 능은 졸본 동쪽 용산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새로 찾은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환인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적성현(赤城縣)  후성진(后城鎭) 부근으로 비정되므로 추모왕의 능은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추모왕릉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홀본(졸본) 동쪽 용산]


 

 ☆ 우리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지금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성을 요녕성 환인의 오녀산산성이라 하고 있으나 이는 착각일 뿐이다. 

 


  2대 유리왕의 능은 두곡 동쪽벌판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유리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죽었으므로 두곡이라는 곳은 국내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런데 국내(국내위나암성, 국내성)는 졸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으로 비정된다.

 

                                                     [위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추정되는 연경현  영녕진고성]

 

 

  3대 대무신왕의 능은 대수촌 벌판,

 

  4대 민중왕의 능은 민중원 석굴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고,

 

  5대 모본왕의 능은 모본벌판,

 

  6대 태조대왕의 능은 기록이 없고,

 

  7대 차대왕의 능 역시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다.

 

  8대 신대왕의 능은 고국곡,

 

  9대 고국천왕의 능은 고국천벌판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까지도 고구려의 도읍이 국내였으므로 이때의 왕릉들은 모두 지금의 영녕진 부근에 조성했을 것이다.   

 

 10대 산상왕의 능은 산상릉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산상왕은 도읍을 환도성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죽었다.

따라서 산상왕의 능은 환도성 부근에 조성했을 것인데, 환도성은 압록강 북쪽 집안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으로 비정된다.

 

 11대 동천왕의 능은 시원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천왕은 관구검에게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 도읍을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겼다. 따라서 동천왕의 능은 평양성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열하행궁(피서산장)이 있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평양성,황성,장안성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의 지형]

 

 

 12대 중천왕의 능은 중천벌판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천, 서천, 중천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그 중 가운데 강을 말할 것이다. 역시 승덕시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13대 서천왕의 능은 서천벌판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양성 서쪽을 흐르는 강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4대 봉상왕의 능은 봉산벌판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봉산(烽山)의 의미가 봉화를 올리는 산이라는 의미이니 이 역시 평양성 부근의 봉화산 아래 벌판에 능을 조성했을 것이다.  


  15대 미천왕의 능은 미천벌판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도읍이 평양성이었으므로 미천 역시 평양성 부근을 흐르는 강일 것이다. 


 16대 고국원왕의 능은 고국원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국원왕은 평양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이거하였다가 연나라 묘용황에게 환도성을 함락 당하자 평양동쪽의 황성으로 옮겼는데,

그 후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자 백제와의 전투를 직접 지휘하다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황성이었으나 평양성과 황성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능은 평양성 부근에 조성했을 것이다. 

 

 17대 소수림왕의 능은 소수림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 동쪽의 황성이었고 소수림왕은 그곳에서 죽었으므로 능은 결국 평양성 부근에 조성했을 것이다.

 18대 고국양왕의 능은 고국양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도읍 역시 황성이었다. 

 19대 광개토대왕부터는 능의 조성위치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서 사라지는데 광개토대왕의 능비인 호태왕비가 지금의 길림성 집안에 서있어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고구려의 도읍은 황성이었고,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황성에서 죽었다면 그의 능은 당연히 당시의 도읍이었던 황성(평양 동쪽 황성) 부근에 조성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길림성 집안에서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방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다른 곳은 다 삭았는데 하필이면 글자가 있는 부분만 멀쩡하게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는 음흉한 중국이 역사왜곡을 위해 가짜 유물을 만든 후 그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20대 장수왕의 능도 조성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그는 도읍을 황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죽었으므로 장수왕의 능은 평양성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인데, 지금 승덕시의 남쪽 흥륭현에 수왕분(壽王墳)이라는 곳이 있다.

 아마 이곳이 장수왕의 능이 조성된 곳이 아닌가 싶다. 


 21대 문자왕, 22대 안장왕, 23대 안원왕, 24대 양원왕의 능도 기록이 없으나 이때 고구려의 도읍이 평양성이었으므로 평양성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25대 평원왕의 능도 기록은 없는데, 그는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죽었다.

따라서 평원왕릉은 장안성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인데, 평양성과 장안성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평원왕의 능도 지금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26대 영양왕의 능도 기록이 없는데, 그는 왕위에 올라 장안성에서 죽었으므로 그의 능은 장안성(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도 했다고 하였으니 두 성은 매우 가까이 위치했을 것이다)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27대 영류왕의 능은 기록이 없고, 


 28대 보장왕의 능은 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어 장안 힐리의 무덤 왼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잊어버렸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는 진짜 고구려 왕릉들을 찾아 그곳이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확인하고 그곳에 제사를 지내 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