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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왕대를 상, 중, 하로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윤여동 2007. 10. 24. 08:10

윤여동설 - 신라 왕대를 상·중·하로 구분한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했을까?

 

 

   삼국사기 경순왕 조에는,
  "나라 사람들이 신라 시조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는데,

  초대부터 진덕왕(진덕여왕)까지 28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中代)라 하며,

  선덕왕(宣德王)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下代)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시조 혁거세거서간 ∼ 28대 진덕여왕    상대
 29대 태종무열왕    ∼ 36대 혜공왕       중대
 37대 선덕왕          ∼ 56대 경순왕       하대

 

  삼국유사 왕력 22대 지증마립간 조에는,
  "(지증마립간)이상을 상고(上古)라 하고,

  이하를 중고(中古)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28대 진덕여왕 조에는,
   "(진덕여왕)이상은 중고(中古)로서 성골(聖骨)의 왕이고,

  이하는 하고(下古)로서 진골(眞骨)의 왕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 혁거세거서간  ∼ 22대 지증마립간  상고     성골(?)
 23대 법흥왕           ∼ 28대 진덕여왕     중고     성골
 29대 태종무열왕     ∼ 56대 경순왕        하고     진골

 

☆ 삼국유사 왕력 진덕여왕 조의 "이상"이라는 것이 진덕여왕으로부터 법흥왕까지 만을 말하는 것인지 진덕여왕으로부터 시조 혁거세거서간까지를 말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한데, 삼국사기 진덕여왕 조에는"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진덕여왕)까지 28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끝의 임금까지를 진골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유사도 진덕여왕으로부터 시조 혁거세거서간까지를 모두 성골의 왕이라 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무엇을 기준으로 했는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고, 왕대를 상·중·하로 나눈 기준 역시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시조로부터 진덕여왕까지가 성골이고, 태종무열왕부터 그 이후의 왕들이 진골이라는 것만은 일치하는데, 여기에서는 삼국사기의 상대, 중대, 하대와 삼국유사의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 부모가 모두 왕족이면 성골이고, 한쪽이 왕족이 아니면 진골이라고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아버지가 용수(또는 용춘)로서 진지왕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진평왕의 장녀인 천명공주이므로 김춘추는 부모가 모두 왕족이다. 그렇다면 그는 성골이어야 마땅한데, 역사는 그를 진골이라 한다.

따라서 성골과 진골의 구분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삼국사기에서 상대로 구분하고 있는 시조 혁거세로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는 박씨, 석씨, 김씨의 세 성씨가 일정한 규칙없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단순하게 혈통만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시조 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진덕여왕까지를 성골이라 한다고 했으므로 이는 신통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즉 이때 신라의 왕위는 혈통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아들이나 동생 또는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 아니라 신아들, 신딸로 왕위가 이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때의 왕위계승은 혈통중심이 아니라 신통중심이라 할 수 있고, 이 왕들이 곧 성골의 왕이고, 이 시기를 신통으로 이어진 시기라 해서 상대로 구분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로부터 36대 혜공왕까지를 중대라 한다고 했는데, 이들은 김춘추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후손들이고 또 진골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신통이 아닌 혈통으로 왕위가 이어진 시기라 할 수 있다.

  김춘추는 백제를 쳐 멸망시킨 왕이고,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왕이며, 경덕왕은 전국의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꾼 왕으로서 이 김춘추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가 실제 신라의 최고 황금기였고 그 이후는 침체기라 할 수 있다. 

     

  왕대                    이름               아버지                       어머니                 비고
  태종무열왕          김춘추         김용수(혹은 용춘)           천명공주          용수(또는)용춘의 장자
  문무왕                김법민         태종무열왕김춘추           문명왕후          태종무열왕의 장자
  신문왕                김정명         문무왕 김법민                자의왕후          문무왕의 장자 
  효소왕                김이홍         신문왕 김정명                신목왕후          신문왕의 장자 
  성덕왕                김흥광         신문왕 김정명                신목왕후          신문왕의 차자
  효성왕                김승경         성덕왕 김흥광                소덕왕후          성덕왕의 차자
  경덕왕                김헌영         성덕왕 김흥광                소덕왕후          성덕왕의 삼자
  혜공왕                김건운         경덕왕 김헌영                만월왕후          경덕왕의 적자

 

☆ 김춘추의 아버지에 대해 "김용수 또는 김용춘"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원래 김춘추는 생부인 김용수와 생모인 천명공주 사이에서 출생했는데, 후일 김용수가 선덕여왕과 혼인하게 되자 천명공주와 김춘추를 그 동생인 김용춘에게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김용춘은 김춘추의 숙부인데 양부가 된 셈이다. 그리하여 김춘추의 아버지에 대하여 말할 때 용수 또는 용춘이라 기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대라고 구분하고 있는 첫 왕인 37대 선덕왕 김양상은 나물왕의 10대 손으로 기록되고 있어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직계혈손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신라의 김씨 왕들은 거의 미추왕이나 나물왕의 후손이기는 하겠지만 같은 김씨 중에서도 이때 신라 왕실의 혈통이 김춘추의 후손에서 나물왕의 10대 손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를 기점으로 구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선덕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물왕의 12대 손인 37대 원성왕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후 신라 하대의 김씨 왕들은 모두 이 원성왕의 혈손들이고, 후대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은 이상하게도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고, 56대 경순왕은 다시 김씨로서 후백제의 서라벌(금성) 침입으로 경애왕이 죽은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려졌는데, 이 시기는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결국 하대라는 것은 신라가 침체기로 접어든 시기로부터 멸망할 때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상대 : 초기 신라를 말하는 것으로서 나라를 건국하고 기초를 다진 때이고,

 

중대 : 융성기를 말하는 것이며,

 

하대 : 쇠퇴기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좀 다르게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하고 있는데,

 

  시조 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22대 지증마립간까지를 상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A.D.503) 조를 보면,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라 했고, 혹은 사로라고도 했으며, 혹은 신라라고도 불렀습니다. 신들의 생각에 '新(신)' 자는 좋은 일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羅(라)' 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 이로써 국호를 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를 모두 帝(제)나 王(왕)으로 불렀는데,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다만 방언으로 왕호를 일컬었을 뿐 아직도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新羅國王(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부터 신라가 정식으로 新羅(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했음을 알게 하고, 왕호도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 등을 사용하지 않고 王(왕)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한마디로 이때 신라는 제도를 획기적으로 혁신한 것이다.
  그리고 13년(A.D.512) 조를 보면,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고 해마다 토산물로서 세공을 바치기로 했다. 원래 우산국은 명주의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라고도 부른다. 땅 둘레가 1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아니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지증왕 15년(A.D.514) 조를 보면,
  "봄 정월 소경을 아시촌에 설치했다. 가을 7월 6부와 남쪽 지방 백성들을 옮겨 그곳을 채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아시촌 소경이 정확히 어디에 설치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소경을 설치해야 할 만큼 나라의 강역이 많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신라가 구제도를 혁신적으로 개혁하고 주변으로 강역도 매우 커졌다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상고란 바로 이 구제도 속에 있던 신라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고는 23대 법흥왕에서 28대 진덕여왕까지를 말하는데,
  삼국사기 법흥왕 19년(A.D.532년) 조를 보면,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그의 세 아들인 장자 노종, 차자 무덕, 막내 무력을 데리고 자기나라 재물과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불교 승려였던 일연은 이를 중요한 전환점이라 보고 법흥왕을 중고의 시작점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따라서 중고란 바로 가야를 합병하고 불교를 공인한 때를 그 시작점으로 하였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하고란 29대 태종무열왕으로부터 마지막왕 경순왕까지를 말하는 것인데, 그 시작인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왕이고, 그 아들인 문무왕 때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백제 땅과 고구려 땅 일부를 신라로 병합한다.
  그리하여 그 이후 신라는 강역이 획기적으로 커졌다가, 신라 말기까지 점점 줄어들어 결국에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연은 이 통일신라 시기를 묶어 하고로 구분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정리해 보면,
 

상고 : 구제도 속에 있던 초기신라를 말하는 것이고,
 

중고 : 신질서로 개편된 시기이고,
 

하고 : 통일신라 시기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구분시점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신라 천년을 초기·중기·말기로 구분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전환점이 되는 중요 시점을 보는 시각이 김부식과 일연이 약간 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