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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공주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 소비(小妃)의 능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5. 25. 19:49

윤여동설 - 공주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 소비(小妃)의 능인가? - 최초주장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전경]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개봉전 모습] 

 

 

  충남 공주에서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백제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백제의 높은 문화수준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고, 특히 중요한 것은 지석이 함께 부장되어 있어 한반도에서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공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왕릉이 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라고도 한다)로서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요 눈썹과 눈이 그림 그린 것 같았고, 인자관후하니 민심이 귀부했다. 모대왕이 재위 23년(A.D.501)에 죽으니 즉위했다"
  "재위 23년(A.D.523)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령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무령왕을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오기로서 무령왕과 동성왕은 이복 형제사이였다. 성왕이 둘째 이복형이었고, 무령왕은 여섯째였다.

 

 

  양나라에서는 무령왕에게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주었다가 그 작위를 올려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주었다고 사서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도,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A.D.523) 五月 丙戌朔 七日 壬辰 崩 到乙巳年(A.D.525) 八月 癸酉朔 十二日 甲申 安?登冠大墓立 志如左(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의 나이로 서기 523년 5월 7일에 붕어했다. 525년 8월 12일에 이르러 관위에 따른 대묘를 설치하고 안장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무령왕의 최종 작위가 영동대장군이었고, (서기 461년 6월 1일에 태어나) 523년 5월 7일에 62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2년 3개월 동안 육탈을 시킨 후 525년 8월 12일에 능을 조성하고 안장했음을 알게 한다.

 

☆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출생시기를 461년 6월 1일로 기록되어 있고, 지석에는 523년 5월 7일에 죽었다고 했으므로 우리 나이로 치면 63세에 죽은 것인데 지석에는 62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 그가 생일인 6월 1일에 못미친 5월 7일에 죽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함께 출토된 대비(大妃)의 지석에는,
  "丙午年(A.D.526) 十二月 百濟國王大妃 壽終居喪 在酉地 己巳年(A.D.529) 二月 癸未朔 十二日 甲午 改葬 還大墓立 志如左
(병오년 12월에 백제국 왕대비(무령왕의 큰 왕비)가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기사년 2월 12일에 대묘로 옮겨 개장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무령왕의 큰 왕비가 526년 12월에 죽어 2년 2개월 동안 육탈시킨 후 529년 2월 12일에 무령왕릉에 합장했음을 알게 한다.
  
   원래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으로서 지금의 난하하류인 중국 하북성 당산시와 진황도 일원이었다.
  그러다가 11대 비류왕의 아들이었던 근초고왕과 12대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武廣王) 사이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고, 패한 무광왕이 365년경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현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건국함으로써 근초고왕의 후손으로 이어진 대륙백제와 무광왕의 후손으로 이어진 반도백제가 병립하다가 100여 년이 흐른 후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인 모도왕 때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병합한 후 모도왕의 둘째 손자인 동성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그 뒤를 이어 동성왕의 이복동생인 사마(무령왕)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따라서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 역시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로서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다가 그곳 웅진(현 하북성 노룡)에서 죽었을텐데, 이상하게도 그의 능은 대륙이 아닌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백제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고, 충남 공주가 백제의 도읍 웅진(熊津)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무령왕이 대륙의 웅진에서 죽으면서 고향인 한반도에 묻히기를 유언했다면, 그 아들인 성왕은 아버지 무령왕의 유골을 한반도로 가져와 능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후일 다시 무령왕의 큰 왕비가 죽자 똑 같은 방법으로 무령왕릉에 합장했을 것이다. 
 

 

송산리 6호분의 주인공은 무령왕의 소비(小妃)이다?

 

                                                   

                            [공주 송산리 6호분 내부와 벽화]

 

  무령왕릉 바로 옆에는 지금 우리가 "송산리 6호분"이라고 부르는 무령왕릉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전축분이 있다.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릉보다는 규모가 약간 작고 그 조성 방법이 매우 비슷하나 관대는 하나만 있다.

  따라서 이 고분은 부부를 위한 무덤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 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고, 무령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무령왕릉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사신도가 벽면의 사면에 그려져 있으나, 정작 부장유물이 도굴되어 지금까지도 그 고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 중 어느 것이 먼저 만들어졌는지 또 동시에 만들어졌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송산리 6호분의 진짜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 것일까?
  사람들은 이 고분이 동성왕릉이나 성왕의 능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송산리 6호분의 주인공이 무령왕의 여러 왕비 중 한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은 바로 연접해 있고, 원래 이 6호분의 배수로 설치작업을 하려다가 바로 그 뒤편에서 무령왕릉을 발견했으므로 이는 이 무덤이 무령왕과 직접 관련 있는 매우 가까운 인물일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송산리 6호분이 실제 무령왕과 직접 관련이 있는 매우 가까운 사람이고, 무령왕과 거의 동급인 어느 한 사람 만을 위한 무덤이라면 이 송산리 6호분의 주인공은 무령왕의 소비(小妃 :작은 왕비)의 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 어느 사람은 송산리 6호분이 무령왕릉보다 일찍 조성되었고, 무령왕보다 일찍 죽은 무령왕의 큰 왕비의 능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 명문에 의하면 무령왕과 왕의 큰 왕비는 무령왕릉에 합장되었다고 했으므로 6호분이 무령왕의 큰 왕비의 능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왕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무령왕에게 대비(大妃: 큰 왕비) 외에 또 다른 왕비 즉 소비(小妃: 작은 왕비)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큰 왕비는 무령왕과 합장했으므로 무령왕의 소비(작은 왕비)가 죽었을 때는 무령왕릉과 되도록 가까운 곳에 무령왕릉과 거의 같은 품격으로 능을 따로 마련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작은 왕비)가 무령왕보다 일찍 죽었는지, 늦게 죽었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소비(작은 왕비)가 무령왕보다 훨씬 젊었을 것으로 본다면 무령왕보다 늦게 죽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에는 부합한다 하겠다.
  따라서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릉을 조성할 때 소비(작은 왕비)를 염두에 두고 함께 만들어 두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무령왕릉이 조성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령왕의 소비(작은 왕비)도 죽자 무령왕릉보다는 조금 규모가 작지만 동일한 품격과 비슷한 형태로 능을 만들고 사방에 사신도를 그린 후 무령왕의 소비(小妃: 작은 왕비)를 장사지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무령왕릉 바로 앞에 6호분과 나란히 조성되었으나 전축분이 아닌 판석으로 쌓고 벽면에 회칠을 한 5호분 역시 무령왕과 관련 있는 인물로서 비(妃)가 아닌 빈(嬪) 급의 무덤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 소비릉(작은 왕비릉)"으로 명칭을 격상시키고 무령왕과 함께 제사를 지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송산리 1, 2, 3, 4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무령왕릉이 그곳에 조성되었고, 그 소비(小妃)와 빈(嬪)의 무덤이 무령왕릉 바로 앞에 품격만 다르게 하여 나란히 조성되었다고 생각할 때, 무령왕릉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송산리 1, 2, 3, 4호분과 무령왕과는 무슨 관계인 것일까?
  송산리 1, 2, 3, 4호분은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급의 신분이었다고 보여지는데, 혹시 그 무덤의 주인공들이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대륙으로 건너갔다가 당시 대륙백제 왕실의 외척이었던 해씨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무령왕의 아버지 곤지의 네 부인들의 무덤들은 아닐까?
  혹시 송산리 고분군은 무령왕 가문의 공동 묘역은 아니었을까?
  일본서기를 보면, 개로왕이 임신하여 만삭이 된 자신의 왕비를 동생인 곤지에게 주었다는 이상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곤지와 개로왕의 왕비가 정을 통하여 만삭이 되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개로왕이 그녀를 곤지에게 주었다는 말이고, 무령왕이 태어났을 때 곤지에게는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고, 동성왕은 그 중 둘째라고 했으므로 동성왕과 무령왕은 이복형제사이였다.  
  따라서 동성왕과 무령왕의 아버지인 곤지에게는 최소한 두 명 이상의 부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외에도 몇 명의 부인이 더 있었는지는 기록에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곤지가 반도백제 모도왕의 태자 신분이었고, 절대 가까워져서는 안 되는 사이였던 대륙백제 왕실의 형수 뻘인 개로왕의 왕비와도 정을 통하여 무령왕을 낳은 것을 보면 여자관계가 복잡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여인과 혼인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송산리 1, 2, 3, 4호분이 곤지의 네 부인의 무덤이라면 그 남편인 곤지의 무덤은 어디에 조성했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 위치는 네 부인의 무덤 바로 뒤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령왕릉과 5호분, 6호분과 같은 삼각배치였을 것이고, 지형을 보면 1, 2, 3, 4호분의 바로 뒤쪽에 고분을 하나쯤 더 조성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것도 아닐테니 관계당국에서는 1, 2, 3, 4호분의 바로 뒤쪽을 정밀 조사해보기를 제안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정말로 도굴되지 않은 곤지의 무덤이 발견된다면 백제는 또 한번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될 것이고, 반도백제의 비밀을 풀어줄지도 모른다.

 

 

                                                

                                    ☆ 성왕, 위덕왕의 능은 충남 부여 능산리에 조성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