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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삼국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 국사, 서기가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6. 2. 00:05

윤여동설 - 삼국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국사·서기가 아니다 - 최초주장

 

고구려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留記)"가 아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A.D.600) 조를 보면,
  "왕이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옛 역사(古史)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어느 사람이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기사 1백권을 써서 유기(留記)라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요약, 수정하였다.
(詔 太學博士 李文眞 約古史 爲新集五券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보고는 유기가 고구려 최초의 역사서였다고 이해하지만 필자는 이 유기라는 역사서는 원래 고구려의 역사서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국초에 어느 사람이 유기를 썼다고 했으므로 그 기록 속에 고구려의 역사가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고, 설령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초기 기록 조금 밖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유기는 고구려 이전의 역사 즉 환인으로부터 환웅, 왕검조선, 부여에 이르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게 되면서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백성들에게 고구려가 환인, 환웅으로부터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정통성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널리 알려 백성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어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옛부터 전해져 내려온 그 유기 100권의 내용을 요약하고 수정하여 새롭게 신집 5권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실제 그러한 목적이었다면 당시 꽤나 많은 부수를 만들어 관리와 호족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또는 지방 행정관서 등에도 비치토록 하여 누구나 쉽게 읽어볼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 고구려의 유기 100권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전해졌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의 상고사에 대하여 아주 세밀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이 유기 100권은 전해지지 않았고, 그를 요약한 신집 5권마저도 전해지지 않았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신라 최초의 역사서는 "국사(國史)"가 아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6년(A.D.545) 조를 보면,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잘하고 잘못한 것을 기록하여 만대에 보여줘 평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편찬하지 않는다면 후대 무엇을 보겠습니까?' 하였으므로 왕이 깊이 공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들을 모집하여 편찬하도록 하였다"(伊찬異斯夫奏曰 國史者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 居柒夫等 廣集文士  之修撰)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보고 신라 최초의 역사서 이름이 "국사(國史)"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 기록만으로는 거칠부 등이 신라의 역사서를 완성했는지, 왕의 마음이 바뀌어 중간에 역사서 만드는 일을 중지하라고 했는지, 아니면 중간에 무슨 사정이 생겨 완성하지 못했는지 사실여부를 알 수 없고, 설령 거칠부 등이 왕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신라의 역사서를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이때 만들어진 역사서의 책이름이 정말로 "국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위의 기록 중에서 이사부가 왕에게 말한 "국사(國史)"라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로 "나라의 역사"라는 뜻이었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국사"라는 역사서의 책이름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거칠부 등이 역사서를 완성한 후 책의 제목을 "국사(國史)"라고 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위 기록만을 근거로 신라 최초의 역사서가 "국사(國史)"였다고 한다면 이는 기록을 한참 잘못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 최초로 만들어졌을 역사서의 이름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백제 최초의 역사서는 "서기(書記)"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A.D.375) 조를 보면,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이래 문자로서 일을 기록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일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 高興 始有書記)"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보고는 백제 최초의 역사서가 "서기(書記)"였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위 기록을 잘 살펴보면 과연 백제 최초의 역사서가 "서기"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위 글의 내용은 백제가 개국 이래로 나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을 문서화하지 않았었는데, 이때부터 박사 고흥이 글로써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개국 초부터 근초고왕 때까지 나라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문서로 작성하여 보관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문서로 작성하여 정부문서로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지 서기라는 역사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역사서가 이때에 만들어졌다면 일본서기 등에 최소한 그 "서기"라는 역사서의 기록을 인용한 기록이 나타나야 하는데, 서기라는 역사서는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서기(書記)는 역사서가 아니라 "글로써 기록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 최초의 역사서가 "서기(書記)"라고 하는 것은 기록을 잘못 이해한 것이고, 실제 백제 최초의 역사서가 무엇인지 우리는 지금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국사시험 등이 있을 때 고구려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이고, 신라 최초의 역사서는 국사이며, 백제 최초의 역사서는 서기라고 해야 점수를 얻을 수 있을테니 유념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와 우리 역사의 진실은 따로 분리하여 익혀 둘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지만 아직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우리의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학자들의 주장도 바뀌지 않을 수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