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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윤관장군이 쌓은 고려 동북 9성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5. 22:52

윤여동설 - 윤관장군이 쌓은 고려 동북 9성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주장

 

[척경입비도 : 고려의 윤관장군이 1108년에 여진을 정벌하여 9성을 쌓은 후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 새긴 척경비를 세우는 장면을 그린 그림] 

 

 

  여진은 본래 말갈의 일족으로서 산림과 잡목지대에 흩어져 살며 아직 통일되지 못하고, 고려의 북쪽지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원래는 숙신이었는데 고구려에 예속되었다가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서자 발해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뿔뿔이 흩어져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가 건국되자 옛 발해 유민의 일부는 고려로 귀부했으나 여진은 고려에 속하지 않고 고려의 변방을 약탈하는 무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고려는 여진이 변방을 괴롭히는 무리라고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 여진을 정벌하기에 이른다.
  이때 고려는 여진이 더 강해지기 전에 미리 쳐서 세력을 약화 시켜 놓는 것이 후환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여진 정벌을 하게 되는데, 고려는 이때 여진의 세력을 완전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윤관 장군이 목숨을 걸고 개척했던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다시 돌려주게 되고 세월이 흘러 바로 이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칭신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금사 고려전을 보면,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벌하자 발해는 금나라에 귀부하였는데 대개 말갈의 후예들이다. 흑수말갈은 옛 숙신 땅에 있었으며 백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는 장백산으로서 금나라가 흥기한 곳이다.
  여직(여진)이 비록 옛날에는 고구려에 예속되었으나 다시 서로 오가지 아니한 지가 오래 되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요나라를 섬기던 옛날 예에 따라 금나라에 칭신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고려는 처음에 여진을 우습게 보고 숙종 9년(A.D.1104)에 임간을 보내 여진을 쳤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강했고 고려군이 패전하게 된다. 그러자 여진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오히려 정주의 선덕산성을 쳐서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게 된다.
  보병전을 주로 하는 고려가, 말 타고 전쟁을 하는 기병전을 펼치는 여진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은 당연했으나 고려는 그를 깨닫지 못했고 여전히 여진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임간 대신 윤관 장군을 다시 보내 여진을 쳤으나 그 역시 패전하게 된다.
  두 장군이 패전을 하자 고려에서는 할 수 없이 여진과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런데 윤관 장군은 여진과 강화를 맺고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고려가 여진과의 전쟁에서 패한 주된 원인이, 여진군이 기병인데 비해 고려군은 보병이었기 때문이라 하며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을 새로 편성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숙종은 그리하도록 허락했고, 윤관 장군은 그 조직을,
  백성 중에 말을 가진 자를 신기군으로 편성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 조탕군, 경궁군, 정노군, 발화군으로 편성하며, 승도(스님)를 항마군으로 편성했다.
  그리하여 편성된 것이 여진 정벌을 위한 17만 명의 별무반이다.    
  그런데 숙종은 재위 10년인 1105년 10월에 죽고  그의 장자인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은 윤관 장군과 오연총으로 하여금 신기군과 신보군을 숭인문에서 사열하게 하고, 1년 동안 훈련을 마친 후 1107년 10월에 이르러 여진 정벌을 위해 17만의 별무반을 출동시키기로 하고, 윤관 장군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는다. 
  예종은 출병하는 장수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11월9일 개경을 출발하여 15일에 서경에 도착했고, 12월에 이르러 왕은 윤관 장군과 오연총에게 부월을 하사함으로써 군사들의 출발을 명한다.
  그리하여 윤관 장군은 전군을 이끌고 장춘역(長春驛)에 이르러 군사를 주둔시켜 정비한 다음 군사를 나누어,
  윤관 장군 자신은 5만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주(定州) 대화문(大和門) 방향으로 나아가고,
  좌군 병마사 문관에게 3만3천9백 명을 주어 정주 홍화문(弘化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중군 병마 김한충에게 3만6천7백 명을 주어 안륙수(安陸戍)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군 병마사 김덕진에게는 4만3천8백 명을 이끌고 선덕진(宣德鎭)과 안해(安海) 사이로 나아가 두 초소 사이를 방어하게 하고,
  선병별감 양유송 등에게는 수군 2천6백 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鱗浦 : 도련포라고도 한다)로 나아가게 한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의 전과는,
  윤관 장군은 37개 촌을 격파하여 2천1백20명을 죽이고, 5백 명을 사로잡았고,
  좌군의 문관은 심곤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백50명을 죽였으며,
  중군의 김한충은 고사한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백80명을 죽이고, 2백30명을 사로잡았고,
  우군의 김덕진은 광탄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백90명을 죽이고 3백 명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고려군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땅을 빼앗게 되자 윤관 장군은 땅의 경계를 획정하고는,

  먼저 네 개의 성을 쌓게 되는데,
  영주성(英州城)을 몽라골현(몽라골령이라고도 한다) 아래에 9백50칸 규모로 쌓고,
  웅주성(雄州城)을 화관산(화곶령이라고도 한다) 아래에 9백92칸 규모로 쌓고,
  복주성(福州城)을 오림금촌에 7백74칸 규모로 쌓고,
  길주성(吉州城)을 궁한이촌(궁한이령이라고도 한다)에 6백70칸 규모로 쌓는다.[최북단]          
  그리고 다음해인 서기 1108년 2월에는 함주성(咸州城)과 공험진성(公嶮鎭城)을 쌓은 후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 정계비를 세우고, 다시 3월에 의주성(宜州城), 통태성(通泰城), 평융성(平戎城)을 쌓아 9개의 성을 완성하고 개선한다.

 

 

  고려사는 이때 윤관 장군이 여진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서북방으로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와 정주 두 고을에 접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는,

  “점령한 지역이 300리이며,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서북방은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 정주 두 고을에 연접하였는바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히 우리 백성들이 거주할 만한데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함주로부터 공험진까지 아홉 개의 성을 축성하고 선춘령에 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공험진은 고령진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고 고라이(古羅耳)를 넘고, 오동첨, 영가첨을 지나면 소하강에 이르는데 강가에 공험진 옛 터가 있고, 남쪽으로는 구주, 탐주와 이웃하고 북쪽으로는 견주에 접했다고 하고,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있으며, 윤관이 이곳까지 개척하고 공험진에 성을 쌓고는 곧 선춘령 꼭대기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의 사면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글자를 새겼으나 오랑캐들이 그 글자를 모두 지워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 속의 두만강을 지금의 한반도 동북쪽 두만강으로 알고 고려의 동북 9성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데 우리는 이렇듯 기록으로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는 고려의 동북 9성 즉 영주, 웅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 평융성의 위치를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왜 우리는 고려의 윤관장군이 목숨걸고 개척했던 동북 9성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고려 동북쪽 땅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이며, 그가 쌓은 아홉 개의 성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고려의 동북 9성이 동북쪽의 여진을 정복하고 설치되었다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따라 지금의 한반도 두만강 북쪽 부근에서 그 아홉 개의 성들을 찾으려 했고, 어느 사람은 함경북도 길주 부근에서 찾으려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함경남도의 함흥 부근에서 찾으려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흔적을 확실히 찾을 수 없었고 설만 무성했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낙랑군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했고 고려의 도읍 개경과 서경을 한반도의 개성, 평양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려가 등주, 내주, 빈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고려도경 속의 고려가 한반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모두가 엉뚱한 곳을 뒤지고 있었으니 지금까지 윤관 장군이 쌓았던 동북 9성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고려의 도읍 개경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고려의 서경이 아닌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의 도읍 개경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현이었고, 서경은 그 북서쪽의 승덕시 부근이었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은 옛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고,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이었고, 고려의 서경인 것이다. 
  그리하여 윤관 장군은 군사들을 고려의 서경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서 출동시켰고, 동북쪽으로 행군하여 장춘역에 주둔시켜 정비한 다음 정주로 이동시켜 그곳으로부터 여진족을 차근차근 몰아낸후 그 북쪽 지금의 서랍목륜하 강변에 아홉개의 성을 쌓았다. 이것이 고려 윤관장군의 동북9성이다.    

  고려의 동북쪽이란  한반도 개성의 동북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관성을 중심으로 한 대륙고려의 동북쪽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고려 역사가 한반도 개성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서 전개되었음을 인식해야 윤관 장군이 목숨 걸고 개척했던 진짜 고려의 동북 9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날 우리는 잃어버린 대륙의 우리 옛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역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인데, 이를 이해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