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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요하문명은 우리 선조들의 동이문명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7. 6. 22:01

윤여동설 - 요하문명은 우리 선조들의 동이문명이다 - 최초주장

 

 

지금까지 중국학자들은 황하의 앙소문화와 양자강의 양저문화를 중국 문명의 시원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만리장성 외곽인 요하 부근으로부터 내몽골 적봉 부근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 홍산문화 때문에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요하문명이 중국 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이고,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도 발전된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이 홍산문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졌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의 경주나 김해에서 기존의 역사와 전혀 이질적인 문화형태인 오르도스형 금관이나 동복이 출토됨으로써 1만리쯤이나 떨어져 있는 중국 북쪽의 오르도스 지방의 문화가 어떻게 한반도 남부에 갑자기 나타나는지 그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고민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학자들은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하고, 황하문명이나 양자강 문명을 버려야 하느냐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러한 고민을 일거에 해소하고 요하문명을 중국의 선사문명에 포함시키기 위해 대두된 것이 황하문명, 양자강문명과 함께 요하문명을 중국 3대 문명으로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기존의 역사인식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또 하나의 문명을 추가하는 형태의 제법 그럴싸한 제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방향을 그렇게 잡고 추진하고 있지만, 사실 이 요하문명은 우리 선조들의 문명 즉 동이문명이지 중국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명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요하문명을 동이문명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와 내몽골 적봉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은 칠로도산이고, 요녕성 조양시와 내몽골 적봉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은 노로아호산인데, 바로 이 칠로도산과 노로아호산이 우리의 환인설화와  환웅설화의 중심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칠로도산(七老圖山)이란 일곱 노인이 그림같이 노니는 산이라는 의미로서 산 이름에 일곱 분의 환인설화가 아로새겨져 있고,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은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한 산이라는 의미로서 환웅설화가 그 산 이름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고조선의 왕검성을 북한 평양이라 하고 있지만 사실 고조선의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이고, 패수는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이다.

 

☆ 고조선의 왕검성은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그곳을 빼앗아 그대로 도읍으로 사용했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후 왕검성을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했으며, 서기 37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전한낙랑군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빼앗아 후일 고구려의 평양성이 된 곳이다.

 

 
 구당서 고(구)려전을 보면,
  "그 나라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1백 리에 있다"라고 역사적 배경과 방향, 거리가 명시되어 있고, 
 신당서 고(구)려전를 보면 평양성의 형태에 대하여,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 라고 성곽의 형태가 기록되어 있으며,
  북사 고구려전에는,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로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평양성의 규모, 형태, 위치를 기록해 놓았는데, 당나라의 서울이라는 의미인 경사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을 말하는 것이므로 서안으로부터 동쪽방향(사실은 동북쪽 방향이다)으로 5천여 리 떨어진 곳에 고구려의 평양성이 위치했고, 평양성은 일반적인 중국 성들처럼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쌓은 성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쌓은 성이며, 성 내부의 동서 길이가 6리(약 2.4km)에 달할 정도로 큰 성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승덕시 피서산장과 거리나 형태, 위치 등이 정확히 일치하고, 그 서쪽과 남쪽으로 난하(옛 패수)가 지난다.
  그리고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에 대하여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갈석산은 지금 중국 하북성 진황도 창려에 있는 산이고, 만리장성 역시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의 발해해변에서 시작되고 있다.
  따라서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이란 진황도 일원을 말하는 것이므로 낙랑군 역시 그 부근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한반도의 경주를 중심으로 천년 왕조를 이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신라의 위치에 대하여,
  양서 신라전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진한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양나라와는) 서로 1만리쯤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나라 때 사람들이 고역을 피하여 마한으로 도망하여 가자 마한에서는 동쪽 경계의 땅을 분할하여 주고 그들을 살게 하였는데, 그들이 진나라 사람이므로 나라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비슷한데, 나라를 방이라 하고, 활을 고라 하며, 도둑을 구,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이라 하며, 서로를 부를 때 모두 도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않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 신라전에는,
  "그 나라는 중국, 고구려,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수서 신라전에는,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구당서에도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기록들 모두를 한반도에 비정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도망쳐 왔다는 것을 중국에서 서해바다를 동쪽으로 가로질러 건너 한반도로 왔던 것이라고 해석했고,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다는 기록은 오기이거나 후세 신라가 강원도 춘천 부근을 차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남겨졌던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역사는 순 엉터리역사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조선의 왕검성이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이었고, 신라가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그 신라의 서쪽에 백제도 있었을 것이고, 신라의 서북쪽에 고구려가 있었을 것이며, 북사에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옥저, 한, 예 역시 진황도와 접하고 있는 지역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옛날 고조선의 중심지도 그 부근인 것이고, 삼국의 중심지 역시 바로 그 부근이지 한반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비정되는 승덕 피서산장 가까이에 환인과 관련 있는 칠로도산이 있고, 환웅과 관련 있는 노로아호산이 있으며, 바로 그 부근에 홍산문화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적봉의 홍산이 있고, 능원이 있고, 조양이 있고, 부신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홍산문화는 우리 선조들인 동이족이 남겨 놓은 것들이지 한족들이 남겨 놓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요하문명은 중국의 3대 문명이 아니라 중국 문명과는 별개의 동이의 선진 문명이었던 것이다.
  태행산맥까지가 원래 동이의 옛 강역이었는데, 요하, 대릉하, 시라무렌강 부근에 어찌 중국문명이 존재할 수 있을까?
  홍산문화를 발굴하면 할수록 동이의 문명이라는 것이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이제는 중국에만 맡겨 놓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발굴자금을 지원하여 우리의 학자들이 직접 발굴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중국학자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한 유물을 감추고 공개하지 않는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 우리의 상고사를 왜곡없이 정확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