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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8. 29. 01:45

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 성은 박(朴)씨
※ 삼국사기에는 "진한 사람들이 호(瓠)를 박이라 하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과 같았으므로 그의 성을 박(朴)씨라 하였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란 뜻이다"라고 혁거세거서간의 성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으나 "혁거세(赫居世)"의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혁거세가 이름인지 시호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혁거세라는 의미가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의미이고, 거서간이 왕이라는 의미라고 했으므로 결국 "세상을 밝게 비춘 왕" 이라는 의미가 되므로 "혁거세"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죽은 후에 붙여진 시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혁거세거서간의 본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 성은 박씨
※ 삼국사기에는 "차차웅을 혹은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말하기를 '(자충이란) 방언으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므로 이를 경외하더니 드디어 높은 어른을 일컬어 자충이라고 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차차웅이라는 의미가 왕과 동일한 뜻이라는 것을 알게 하므로 결국 남해왕이라는 말과 같다.
  다만 남해가 이름인지 시호인지는 불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시호일 것이라 생각되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환단고기 이맥의 태백일사를 보면, "사로의 첫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했으므로 사람들이 의심할까 하여 눈수로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으로 와서 (아들을 낳았다). 이때 소벌도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으로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정하고 나라를 진한이라 하였는데, 또한 사로라고도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는 혁거세거서간의 어머니인 파소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부여 왕실의 공주신분인 파소가 혼인 전에 어느 남자와 사랑에 빠져 덜컥 임신이 되어 어찌할 방법이 없자 부여에서 도망쳐 동옥저를 거쳐 진한 나을촌으로 와서 혁거세를 낳았고, 이가 자라 신라의 건국시조가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여란 동부여를 말하는 것으로서 해부루(解夫婁)가 건국시조이고,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증손자이다. 따라서 파소는 동부여 해부루왕의 딸이고, 성씨 역시 "해(解)" 씨일 것인데, 그녀는 북쪽의 동부여를 떠나 남쪽의 진한으로 와서 해부루왕의 외손자인 혁거세를 낳았고, 혁거세는 다시 남해를 낳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남해(南解)"라는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는데, 남해왕란 "남쪽에서 왕이 된 해씨" 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므로 신라가 동부여 왕실의 성씨인 해씨와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시호를 "남해왕" 이라 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 성은 박씨
※ 이사금이 이빨자국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어딘가 어색하므로, 왕이란 의미의 방언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고, 삼국유사에는 니질금(尼叱今)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유리왕이라는 의미가 "유학의 이치에 통달했던 왕"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므로 역시 시호일 것이다. 유리이사금은 효와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왕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5년 조를 보면,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평안하여져서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으니 이것이 노래와 음악의 시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때 신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노례이질금(弩禮尼叱今)이라 기록되어 있다. 

 

 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 성은 석(昔)씨
※ 삼국유사에는 토해니질금(吐解尼叱今)이라고도 했고, 아버지는 완하국 함달파왕, 혹은 화하국왕, 어머니는 적녀국왕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는 탈해왕의 성씨를 "까치작(鵲)" 자에서 "옛 석(昔)" 자를 떼어 성씨로 삼았고, 궤짝을 풀고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 라고 이름지었다고 하고, 그가 왜국 동북쪽 1천여리 떨어져 있는 여국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탈해는 기원전 5년생으로서 혁거세거서간 53년에 해당된다. 그런데 기록들을 보면, 탈해가 진한으로 온 때 적어도 7-8세 정도 되었다고 보여지므로 탈해가 자신의 신분이나 성씨 그리고 이름을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해는 이름이 아니라 죽은 후에 붙여진 시호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해지는데, 왜 신라의 대신들은 그의 시호를 하필 "탈해(脫解)" 또는 토해(吐解)라고 했던 것일까?
  탈해왕(脫解王)의 의미를 "해씨에서 벗어난 왕"이라고 하고, 토해왕(吐解王)을 "해씨를 토해낸 왕"이라고 해석한다면 이해가 가능해 진다.
  왜냐하면 탈해왕은 남해왕의 공주와 혼인하였던 남해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는 실제 해씨의 혈통과는 전혀 무관한,  해씨(解氏)의 계열에서 벗어난 임금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라 초기에는 해씨의 혈통을 조금이라도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신분을 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듯 하다.
        
 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 성은 박(朴)씨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 성은 박씨
※ 삼국유사에는 지미(祗味)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성은 박씨

 

 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 성은 박씨

 

 9대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 성은 석(昔)씨
※ 탈해왕이 해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남해왕의 공주와 혼인했고, 벌휴이사금은  그 자손인 구추각간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해씨의 혈통을 어어 받은 외손(外孫)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10대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 성은 석씨
※ 이 시호에도 해(解)자가 들어 있는데 해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 성은 석씨

 

12대 점해이사금(沾解尼師今) : 성은 석씨
※ 우리가 점해라고 읽고 있는 "沾" 자는 "점"이 아니라 "젖을 첨"자이다. 따라서 첨해이사금이라고 읽어야 옳을 것이다. 이 시호에도 "해(解)"자가 들어 있는데, 첨해왕라는 의미도 해씨의 혈통과 관계 있는 왕이라는 의미이다. 삼국유사에는 이해이질금(理解尼叱今)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성은 김(金)씨
※ 삼국유사에는 미조(味炤) 또는 미조(未祖) 또는 미소(未召)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어머니가 해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비갈문왕의 딸 박씨 생호부인 또는 술예부인이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 성은 석(昔)씨
※ 유교의 예를 중시했던 왕이었을 것이다.

 

15대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 성은 석씨
※삼국유사에는 기립왕(基立王)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가 "터에 무언가를 세운 왕"이라는 의미라면 그는 이때에 이르러 신라의 각종 제도를 현실에 맞도록 고쳤다는 말이 된다.

 

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 성은 석씨
※ 옥편에는 "訖" 자를 "마칠 글"자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를 "흘" 자라고 하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이 글자가 실제 "흘"이 아니라 "글"자라면 글해이사금이라고 해야 옳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글해왕의 의미가 "해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임금"이라는 의미라면 혁거세왕의 어머니인 파소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손은 흘해이사금을 끝으로 절손 되었던 것일까? 
  삼국유사에는 "걸해(乞解)"로 기록되어 있다.

 

17대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 성은 김(金)씨
※ 대개 나물이사금을 내물이사금이라고 하는데, 10대 나해이사금은 나해라 읽으면서 나물이사금을 말할 때에만 같은 글자인 "어찌 나(奈)" 자를 "내"로 읽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물이사금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麻立干)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부터 김씨들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석씨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며, 박씨들은 8대 아달라왕의 후손으로 기록되고 있는 53대 신덕왕이 국인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고 그 아들  54대 정명왕, 정명왕의 동생인 55대 경애왕이 왕위에 오를 뿐이다.
       
18대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성은 김씨
※ 실성이사금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향력 아래 신라의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392년인 나물왕 37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401년 가을 7월에 돌아왔고, 402년 2월에 나물왕이 죽자 그 아들인 눌지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였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때의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과 같았다.
  다만 별로 도덕적이지 못했던 왕으로 기록되고 있는 실성왕의 시호를 "실제 성인과 같은 왕"이라는 의미의 실성이라 했는지는 의문이라 하겠다. 눌지왕의 왕비가 실성의 딸이었기 때문에 대신들이 눈치를 보았을까?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으로 기록하고 있고, 보주왕(寶主王) 또는 보금(寶金)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대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성은 김씨
※ 삼국사기에는 왕호인 마립간에 대하여 "김대문이 말하기를 '마립이라는 것은 방언으로 말뚝이라는 의미인데, 함조라고도 한다. 직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왕 말뚝을 중심으로 신하 말뚝을 그 아래에 벌려 놓으므로 이로 인하여 왕호를 삼았다'고 했다"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품계석을 말하는 듯 하다.
  그리고 눌지왕은 장수왕의 영향력 아래 실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듯 한데, 실성왕이 나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앙갚음으로 눌지의 동생인 복호를 412년에 고구려로 볼모로 보냈었는데,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고 장수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러한 사실을 장수왕이 알게되어 실성을 제거하고 눌지를 왕위에 올리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눌지왕"이라는 시호는 "말을 잘 하지 않던 왕" "말이 어눌했던 왕" 이라는 의미인데, 그는 평소에 아주 신중하게 생각한 후 꼭 필요한 말만을 했거나, 정책을 필요이상으로 아주 신중하게 검토한 후 결정했던 듯하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시호를 정할 때 눌지라고 했을까?  
  삼국유사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성격이 내성적이었다는 의미이다.

 

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 성은 김씨
※ 성품이 자비스러웠던 모양이다. 

 

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 성은 김씨
※ 소지왕은 시호로 보아 많은 지식을 갖추고 그를 정치에 반영하려 했던 왕으로 보이는데, "炤"자는 "비칠 조" 자이다. 따라서 조지마립간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 
  삼국유사에는 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으로 기록하고 있다.

 

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 김지대로(金智大路) 혹은 김지도로(金智度路), 또는 김지철로(金智哲老)
※ 지증마립간 재위 4년인 503년에 국호를 신라라 하고 처음으로 왕칭을 했으므로 시호는 지증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증왕의 시호에 담긴 뜻은 "지혜로움을 증명한 왕"이라는 의미이고, 이때부터 신라왕들의 이름이 기록되기 시작하므로 "지증왕"이라는 것이 이름이 아니라 시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지정마립간(智訂麻立干)으로 기록하고 있다.  

 

23대 법흥왕(法興王) : 김원종(金原宗)
 
24대 진흥왕(眞興王) : 김삼맥종(金 麥宗) 또는 김심맥부(金深麥夫)

 

25대 진지왕(眞智王) : 김금륜(金金輪) 혹은 김사륜(金舍輪)
※ 금륜과 사륜의 글자형태가 비슷하여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시호는 "진정 지혜로운 왕"이라는 의미인데, 그는 왕위에서 쫓겨났는데도 진지왕이라는 시호를 얻었으니 우리가 지금 잘 모르는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26대 진평왕(眞平王) : 김백정(金白淨)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 김덕만(金德曼)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 김승만(金勝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김춘추(金春秋)

 

30대 문무왕(文武王) : 김법민(金法敏)

 

31대 신문왕(神文王) : 김정명(金政明)
※ 삼국사기에는 유일하게 이 신문왕의 자(字) 만 "일조"라고 밝혀져 있다.

 

32대 효소왕(孝昭王) : 김이홍(金理洪) 또는 김이공(金理恭)

 

33대 성덕왕(聖德王) : 김흥광(金興光)
※ 본래 이름은 김융기(金隆基)였으나 당 현종의 이름과 같았으므로 김흥광(金興光)으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34대 효성왕(孝成王) : 김승경(金承慶)

 

35대 경덕왕(景德王) : 김헌영(金憲英)

 

36대 혜공왕(惠恭王) : 김건운(金乾運)

 

37대 선덕왕(宣德王) : 김양상(金良相)
※ 삼국유사는 양상(亮相)으로 기록하고 있다.

 

38대 원성왕(元聖王) : 김경신(金敬信)
※ 삼국유사에는 경신(敬愼)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39대 소성왕(昭聖王) : 김준옹(金俊邕)
※ 삼국유사는 소성왕(昭成王)이라 한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40대 애장왕(哀莊王) : 김청명(金淸明)
※ 삼국유사에는 중희(重熙)라고 한다고도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에는 중흥으로 기록되어 있다.

 

41대 헌덕왕(憲德王) : 김언승(金彦昇)
※ 삼국유사에는 언승(彦升)으로 기록되어 있다.

 

42대 흥덕왕(興德王) : 김경휘(金景徽)
※ 본래 이름은 김수종(金秀宗)이었고, 삼국유사에는 경휘(景暉)로 기록되어 있다.

 

43대 희강왕(僖康王) : 김제륭(金悌隆) 혹은 김제옹(金悌 )

 

44대 민애왕(閔哀王) : 김명(金明)
※ 삼국유사에는 민애왕(敏哀王)이라 한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45대 신무왕(神武王) : 김우징(金祐徵)

 

46대 문성왕(文聖王) : 김경응(金慶膺)

 

47대 헌안왕(憲安王) : 김의정(金誼靖) 혹은 김우정(金祐靖)

 

48대 경문왕(景文王) : 김응렴(金膺廉) 혹은 김의렴(金疑廉)

 

49대 헌강왕(憲康王) : 김정(金晸)

 

50대 정강왕(定康王) : 김황(金晃)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김만(金曼) 혹은 김탄(金坦)
※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의 이름을 만헌(曼憲)으로 기록하고 있다.

 

52대 효공왕(孝恭王) : 김요(金嶢)

 

53대 신덕왕(神德王) : 박경휘(朴景暉)

 

54대 경명왕(景明王) : 박승영(朴昇英)

 

55대 경애왕(景哀王) : 박위응(朴魏膺)

 

56대 경순왕(敬順王) : 김부(金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