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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대무신왕 - 무력을 귀신처럼 휘두른 전쟁의 신

윤여동 2008. 9. 3. 07:18

대무신왕 - 무력을 귀신처럼 휘두른 전쟁의 신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아버지는 유리왕이요,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작은 딸로서 유리왕 23년(A.D.4)에 태어났다.
  유리왕은 처음에 송양의 큰딸을 왕비로 삼았는데, 첫 아들인 도절을 낳고는 그 후유증으로 바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뒤 화희와 치희라는 두 여인을 계비로 맞아들였는데 화희는 골천 호족의 딸이었고, 치희는 신분이 낮은 한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화희와 치희는 서로 질투하고 화목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화희가 치희의 신분을 들먹이며 모욕하자 치희는 화가 나서 자기의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자, 유리왕이 그 사실을 알고 뒤쫓아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왕이 쓸쓸하게 혼자 돌아오다가 나무 아래에서 쉬는데, 황조(꾀꼬리) 두 마리가 노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외로운 심경을 읊었는데, "훨훨 나는 꾀꼬리도 자웅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 외로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가나" 라고 노래 불렀다는 것이 유명한 황조가(黃鳥歌)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화희도 해명이라는 유리왕의 둘째 아들을 낳게 되었고, 태자로 봉했던 장자인 도절이 죽고,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위나암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는 송양의 작은 딸을 다시 맞아들여 왕비로 삼고는 화희 소생인 둘째 아들 해명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해명은 도읍 이전을 반대하며 졸본에 머물러 있었고, 이때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무휼이 태어나게 된다.
  몇 년이 지나도 해명이 도읍이전을 반대하며 국내로 오지 않자 결국 유리왕은 자신의 아들이며 태자로 봉했던 해명에게 칼을 보내 자살하라 명령하여 해명은 죽게 되고, 서기 14년에 이르러 11살짜리 무휼을 새로이 태자로 봉하게 되는데, 이가 곧 후일의 대무신왕이다.

 

☆ 유리왕은 모두 다섯 명의 친아들과 한 명의 양아들을 두었는데, 도절(요절함), 해명(유리왕의 명을 받고 죽음), 무휼(대무신왕), 해색주(민중왕), 여진(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음)과 재사(태조대왕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무휼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10세에 벌써 군사를 이끌고 동부여의 침공군을 격멸 시켜 승전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유리왕이 서기 18년에 죽자 15세의 나이로 고구려 3대왕에 올라 서기 21년 12월에 동부여 정벌길에 올라 정복전쟁이 시작된다.
  이듬해 2월 고구려군의 장수였던 괴유가 동부여왕 대소를 죽이게 되자 그 해 4월에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수가에 나라를 세우니 이가 곧 갈사국이고, 가을 7월에는 대소왕의 조카가 1만여 명의 유민을 이끌고 투항해오자 연나부에 살게 한다.
  그리고 서기 26년에는 개마국을 쳐 그 나라 왕을 죽이고 군현으로 만들자 이웃한 구다국은 스스로 투항하여 오게된다.
  서기 28년에는 후한의 요동태수가 침공해오자 성문을 닫고 지구전을 펼쳐 후한군이 물러가도록 했고, 서기 30년에는 낙랑동부도위를 쳐 병합시키고, 서기 37년에는 최리의 낙랑국을 쳐 없애버리고 고구려에 병합시키는데, 이때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대무신왕은 주변나라들을 정복하여 나라의 강역은 많이 넓혔으나 그 아들인 5대 모본왕을 끝으로 그 후손들은 더 이상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고구려의 왕통이 해씨에서 고씨로 바뀌고 만다.
  대무신왕은 모본호족의 딸을 첫 왕비로 맞아들였고, 후일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왕비로 맞아들였는데, 호동왕자는 바로 이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아들이고, 모본왕해우는 모본호족의 딸이 낳았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호동을 매우 귀여워하자 첫 왕비는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호동이 태자로 봉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호동을 모함하여 죽이고 만다.

 

☆ 옛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의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많다.
  어느 사람은 낙랑군은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고, 최리의 낙랑국은 북한 평양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전한 → 왕망의 신나라 →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최리라는 사람이 전한 때 설치했던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칭왕을 했다가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한 것으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과 호로도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 서기 44년 9월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탈취하여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들어 있어 사람들은 이 기록을 읽고는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데 이는 그리 혼란스럽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낙랑군과 낙랑국은 원래 동일한 곳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에 전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이었는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이었고, 현토군은 그 동쪽인 호로도시, 조양시, 부신시 일원이었으며, 임둔군은 승덕시 풍녕현 부근이었고, 진번군은 하북성 당산시 일원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을 졸본부여에게 빼앗기게 되고, 진번군을 마한에게 빼앗기게 되자 전한에서는 현토군의 관할지를 낙랑군에 이관하고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인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 부근으로 옮기게 된다.
  그런데 낙랑군에서는 원래 현토군의 관할지를 이관받고 보니 그 지역이 단단대령이라는 큰 산맥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직접 통치하기가 어렵자 그곳의 7개현을 따로 떼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는데 전한 말의 혼란기에 최리가 그 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 땅을 차지한 후 낙랑국이라 하고 칭왕을 하다가 대무신왕에게 그 땅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낙랑 땅을 차지한 후 7년이 지난 서기 44년에 이르러 후한의 광무제가 옛 낙랑 땅을 탈환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하여 살수이남 땅을 빼앗아 그곳에 다시 낙랑군을 설치하게 되는 것인데,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부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살수를 청천강으로 인식하고 있고, 패수를 대동강이라 하며, 낙랑이 북한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살수란 지금 북경 동북쪽 풍녕을 지나 밀운수고로 흘러드는 조하를 말하는 것이고, 패수는 승덕시 남쪽을 지나는 난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무신왕은 서기 44년 9월 후한의 광무제에게 살수이남 땅을 다시 빼앗기고 10월에 41세의 나이로 죽고, 그 아들이 어려 대무신왕의 동생인 민중왕 해색주가 왕위에 올랐다가 죽은 후에야 대무신왕의 아들인 모본왕 해우가 왕위를 잇게 된다.
  어느 사람은 대무신왕이 후한과의 전투 중에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