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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시조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9. 17. 05:08

윤여동설 - 백제시조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시조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이다.
  기록을 보면,

  "백제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필자주 : 동부여의 오기이다)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여왕(필자주 : 졸본부여왕이다)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 삼 형제가 있었다. 왕이 주몽을 만나보고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부여왕(졸본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그의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 아들은 온조이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다면 누구나 온조왕이 주몽의 친아들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주몽이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 혼인하여 낳은 두 아들이 비류와 온조라고 했기 때문이고, 혹시 주몽과 월군여자와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주몽의 친아들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주몽에게 세 아들이 있어 장자는 유리, 둘째는 비류, 셋째는 온조라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 주몽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오기 전에 그곳에서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하여 임신 중에 있었고, 후일 태어난 아이가 유리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는 또 하나의 설이 기록되어 있어 비류와 온조의 친아버지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기록을 보면,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필자주 : 동부여왕의 오기이다)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우태에게로 시집을 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 홀로 살았는데, 그 후 주몽이 부여(동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지방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를 들어 왕비를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고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하게 대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여겼다.
  주몽이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유리)가 오게 되니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고, 그 뒤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동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에 우리 어머니가 재산을 털어 나라의 위업을 성취하도록 도와 주었으니 어머니의 성력과 공로가 많았었다.
  (그런데 이제)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시게 되고 나라가 유류(유리)에게 귀속되니 우리들이 공연히 여기에서 빌붙어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지방으로 가서 땅을 선택하여 따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는 드디어 그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비류와 온조의 친아버지는 우태이고, 친어머니는 소서노라는 말이 되어 아버지가 주몽이고, 어머니가 졸본부여 둘째 공주 또는 월군여자라는 앞의 기록과는 전혀 다르게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렇듯 비류와 온조의 혈통에 대하여 전혀 다른 두 설이 함께 실려 있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류와 온조의 혈통에 대하여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기록이 옳은 것일까?
  비류와 온조는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까 아니면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까?
  이 기록들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동명왕"이란 인물이 과연 주몽을 말하는 것인가를 먼저 밝혀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을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고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세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하여 그렇다면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나라를 세우고 바로 전해인 기원전 19년 9월에 죽은 아버지인 주몽의 사당을 세웠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만약 그 친아버지가 주몽이 아니라 우태라면 "동명왕"이라는 인물은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 북사 백제전을 보면, "백제국은 대개 마한에 속했는데, 색리국에서 나왔다.
  왕이 출행 중에 시녀가 임신을 하여 왕이 환궁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더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서 큰 계란 만한 기(氣)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감응하여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여 왕이 그 시녀를 살려 주었다.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버렸더니 말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그 아이를 기르도록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여 활을 잘 쏘자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려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동명이 도망하여 남쪽의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은 그를 딛고 강을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 원래 백 집이 건너 왔다고 하여 백제(百濟)라고 했다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명왕을 백제의 선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명쾌한 기록이 엉뚱하게도 우리가 지금 정사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 속에 들어 있다.

 

☆ 환단고기는 계연수라는 사람에 의해 1911년에 편찬된 책으로서,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를 한데 묶은 것인데, 책 속의 내용들에 대하여 신뢰하는 사람들과 위서라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어 논란이 많다. 필자가 보기에는 일부의 내용은 정확하기도 하고 또 일부의 내용은 잘못된 곳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환단고기 북부여기를 보면, 북부여기 상, 북부여기 하, 가섭원 부여기로 나누어져 있는데, 북부여기 상은 북부여의 왕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고, 북부여기 하는 졸본부여의 왕대에 대한 기록이며, 가섭원 부여기는 동부여의 왕대에 대한 기록인데, 기록을 세밀하게 검토해보면,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시조인 천제 해모수의 고손자로 나타나고, 동명왕이라는 사람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로, 해부루는 동부여의 건국시조로 나타난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고리군의 왕 고진(해진의 오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해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있어 공을 세워 봉해진 것이다. 불리지는 일찍이 압록강 서쪽 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즐겨(사실은 겁탈한 것이다) 그녀를 맞아들여 고주몽(해주몽의 오기)을 낳게 하였다. 곧 임인 5월 5일로서 한나라 왕 불릉의 원봉 2년(B.C.79)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몽의 출생시기를 기원전 79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주몽이 해모수의 고손자이며 아버지가 불리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주몽과 동명왕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고 출생시기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한 해인 기원전 108년에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했다고 하고, 기원전 86년에 이르러 북부여를 병합하자 북부여 4대 해우루왕의 동생이었던 해부루가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옮겨 동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후예인 주몽은 기원전 79년에 태어나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도망쳐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 혼인한 후 그 해 10월에 이르러 졸본부여 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동명왕은 주몽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서 동명왕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이고, 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나 동부여에서 살다가 알 수 없는 사연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가서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고, 왕이 죽자 그 왕위를 이어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고, 후일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와도 재혼을 했었으며,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다시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되었다는 것은, 졸본부여라는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맨 먼저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고 했는데,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우태가 일찍 죽어 과부가 되었다가 주몽과 다시 재혼을 했으며,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같이 여겼었다 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 소서노가 재혼하면서 데리고 들어온 의붓아들이었으므로,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태자로 봉해지자 빌붙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멀리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온조왕은 한산 부근에 나라를 세우고 맨 먼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인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 우태와 소서노사이에서 출생했던 것이고, 온조는 우태의 둘째 아들로서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둘째 증손자인 것이다.
  온조왕의 입장에서는 주몽이 한 때는 의붓아버지였기는 하지만 자기 증조할아버지가 세운 나라인 졸본부여를 빼앗아간 원수나 다름없는데,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웠을 리는 없는 것이다.

  

☆ 삼국사기에는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인 우태가 북부여 해부루의 서손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우태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둘째 아들의 아들 즉 손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