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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초기 현토군과 낙랑동부도위와의 관계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12. 15. 00:06

 

 윤여동설 -  초기 현토군과  낙랑동부도위와의 관계 - 최초공개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필자 주 : 구려의 오기이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후에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옥저 땅에 초기 현토군의 치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후한서 예전에는,
  "원봉3년(B.C.108)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임둔·현토·진번으로 나누었는데,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합쳤다가 현토를 다시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으며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다.
  예(동예)가 한나라에 내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져 금지하는 법도 늘어나 60여 개 조에 이르게 되었다. 
  건무 6년(A.D.30) (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단단)대령 동쪽의 땅을 포기하고 그 거수로서 현후를 삼고 모두 때때로 조하하도록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원래 현토군은 옥저(동옥저)를 관할하는 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부여의 남쪽에는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위치를 충분히 찾을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기록에 따라 이들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약수            선비            부여                 읍루
 
                          
                                                                  대해
               고구려              옥저
                                  (초기현토)
                          
              (후한)낙랑                예               
                                                    
          
                                            진한
                                 
   
  위와 같은 배치가 되는데,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북한의 평양이라 인식하고 있고, 신라의 도읍 금성이 한반도 경주였다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는 당연히 경주의 북쪽인 강원도 강릉 쯤에 치소를 두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대해란 동해를 말하는 것이며, (후한)낙랑은 강원도 춘천쯤에 위치했을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동옥저는 함경남도 함흥쯤에 치소를 두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읍루는 두만강 부근으로부터 연해주 부근, 부여는 압록강 북쪽에, 선비는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약수는 흑룡강 쯤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평양성을 하북성 승덕시 일원, 예(동예)를 내몽골 고륜기부근, 진한을 요녕성 금주시 일원, 읍루를 대흥안령산맥 부근, 부여를 내몽골 정람기 부근으로 비정한다면 결국 옥저는 지금의 칠로도산 동쪽 내몽골 옹우특기,  적봉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부근이 바로 초기 현토군이 설치되었던 곳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개마대산이란 바로 지금의 대흥안령 산맥을 말하는 것이 되고, 단단대령이란 지금의 칠로도산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결국 낙랑동부도위란 바로 지금의 대흥안령산맥 중 칠로도산 산맥의 동쪽  객라심기, 영성 부근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찾고보니  그곳은 옛 진번군, 현토군 땅으로서 그 일부가 자립하자  그 남은 현으로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던 것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