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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漢) 고조 유방과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8. 16. 06:21

윤여동설 - 한(漢) 고조 유방과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관계 - 최초주장  

 

 

  지금 중국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漢)나라가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도움을 받아 건국된 나라였다고 하면 중국 사람들에게는 자존심 상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전한서 권1상 고제기 제1상 4년(B.C.203) 조를 보면,

  “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 라는 안사고의 주가 달려 있다.

  이의 뜻은 “기원전 203년에 북맥과 연나라가 용감한 기병을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라는 뜻이고, “맥은 동북방에 있는 삼한의 지속으로 모두 맥류이다”라는 뜻이다.

 

☆ 중국 사람들은 주변의 민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맥(貉, 貊)은 동호(東胡), 숙신(肅愼)과 함께 고대 중국의 동북부지역에 거주한 민족이다.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를 맥(貊, 貉) 또는 예맥(濊貊)이라 불렀는데, 기원전 203년경의 북맥(北貉)이란 고구려의 조상인 북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203년은 진나라 말기로서 매우 혼란하던 시기였다.

  특히 항우가 기원전 206년에 서초(西楚)의 왕위에 올라 팽성에 도읍하고 패왕(覇王)에 올라 초나라의 의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게 되어 중원의 주인이 되는 듯 했으나 기원전 203년에 북맥과 연나라가 용감한 기병을 보내 유방을 도와주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한(漢: 전한)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전 203년에 유방에게 용감한 기병을 보내주어 한나라의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북맥의 왕은 과연 누구였을까?   

  범장의 북부여기 상을 보면,

  “시조 단군 해모수(재위 45년)

  임술 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다.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오우관을 쓰고 용광검을 차고 오룡거를 탔다. 따르는 종자 500여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시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중략)

병오 45년(B.C.195) 이해 겨울 (해모수)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웅심산 동쪽에 장사지내고 태자인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기원전 203년 당시 북부여의 왕위에는 해모수가 재위 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기원전 203년에 용감한 기병을 보내 유방을 도와 항우를 제거하고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북부여 해모수라는 말이 된다.

  북부여 해모수가 한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공짜란 없는 법이고, 이는 국가 간에도 똑같은 룰이 적용된다.

  거란이 석경당에게 군사를 지원해 주어 후진을 건국하게 해 준 대가로 옛날 고조선 때 연나라 진개의 침공을 받고 빼앗겼던 연5군 지역을 포함하는 연운 16주를 할양받아 대제국 요나라로 발전했듯이, 군사를 지원하여 나라를 세우게 해 주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북부여는 군사를 지원하는 대가로 유방에게 요동군 땅을 요구했던 듯 하고, 실제 한(漢)나라가 서자 한나라는 북부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국경을 진(秦)나라 때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으로부터 요수(遼水)로 후퇴시켜 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서에는 땅을 할양하여 주었다는 기록은 차마 남길 수 없었던지 사마천은 사기 조선전에 “한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가 어렵다 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요수(필자주 : 원문에는 패수로 되어 있으나 요수의 오기이므로 필자가 고쳤다)까지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라고 기록했다.

  멀어서 지키기가 어려워서 그를 포기하고 국경을 후퇴시켜 정했다?

  이는 말이 안 되는 옹색한 변명이지만 군사지원의 대가로 요동군 땅을 북부여에게 할양하여 주었던 것을 사실대로 기록할 수가 없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얼마 후 한 고조 유방이 죽고 기원전 195년에 이르러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위만은 조선(고조선)의 준왕에게로 망명해오게 되고 준왕은 위만을 만번한 부근의 상하운장에 살게 해 주게 된다.

 

☆ 범장의 북부여기 상 시조 해모수 조를 보면, “병오 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북부여)에게 망명을 요청했으나 단제(해모수)께서는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단제(해모수)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임명하고 상하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앞뒤 상황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배은망덕하게도 조선(고조선)의 준왕이 베풀어준 은혜를 저버리고 위만이 쿠데타를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고 왕검성을 차지한 후 조선(위만조선)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준왕은 좌우궁인들과 측근들을 이끌고 급히 남쪽으로 도망쳐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금마에 도읍하고 다시 한(韓)을 건국하고 한왕에 오르는 것이다.

  그랬다가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는 것이고, 북부여 땅이었을 요동군 땅에서는 졸본부여가 건국되고, 기원전 86년에 이르자 북부여는 졸본부여에게 멸망당하고 북부여의 왕족인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장소를 옮겨 동부여가 건국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후 졸본부여는 고구려로 발전하게 되고, 마한의 동북쪽에서는 백제가 건국되고, 진한 땅에서는 신라가, 변한 땅에서는 가야가 건국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를 보면 대개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 또는 국내성이 요동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고, 백제의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는 대개 “대방군공 백제왕”인데, 이는 백제가 대방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신라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는 대개 “낙랑군공 신라왕”인데 이는 신라가 낙랑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북부여 해모수가 한(漢)나라의 유방에게 군사를 지원하고 그 대가로 확보해 놓았던 요동군 땅에서 그 고손자(또는 5세손자)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했으니 당시 해모수가 요동군 땅을 확보해두었던 것이 어쩌면 하늘의 계시는 아니었을지..................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러한 북부여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고, 북부여의 강역이나 도읍도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연 많은 요동군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의 요하동쪽?

  아니다.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부여도 원래는 요동군에 접해 있는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은 뻔한 일이고, 동부여와 졸본부여 역시 그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세 부여는 지금 한반도의 북쪽 압록강 너머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북쪽 하북성, 내몽골에 존재했던 나라였던 것이고, 고구려의 건국지 역시 그 부근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건국지가 한반도 북쪽 압록강 너머 환인이라고 하고, 삼한이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니 착각도 이만 저만한 착각이 아니다.